의료보험 문제의 두가지 결말 – 식코와 킹덤

호러물인 킹덤을 보신 분들이 많은가 궁금합니다. 킹덤은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한 종합병원을 무대로 일어나는 갖가지 기이한 현상들을 담은 영화입니다.

그 종합병원에 스웨덴에서 건너온 저명한 신경외과의사인 스티그 헬머박사는 편협하고 이기적이면서도 주변사람들과 어울릴 줄 모르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제가 그 영화를 다 보지는 못했지만, 전반부를 보면서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는 부분은 젊은 전공의와 마찰을 빚던 부분입니다. 젊은 전공의가 한 노인환자를 진찰을 하면서 CT촬영이 필요하다고 판단, 이를 지시하려는 데 헬머박사는 이를 단박에 거부해 버립니다. 물론, 전공의와 헬머박사가 대판 붙지만 지위가 높은 헬머박사를 어쩌지는 못하고, 나중에 이 노인의 증세는 악화되어 버리고 맙니다. 헬머박사가 CT를 거부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쓸데없이 CT를 해대다가는 병원재정(국립병원이니까 행정이라고 하는게 맞을지도)이 구멍이 난다는 겁니다. 이게 킹덤이라는 영화에서 제가 인상깊게 기억했던 덴마크 무상의료의 맹점입니다.

식코라는 영화를 직접 보진 않았지만, 여기저기에서 구체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사례들을 보면, 미국의 민간의료보험도 구체적인 방식은 다르겠지만 헬머박사가 했던 일들을 계약한 의사들이나 보험회사 직원들이 똑같이 반복하도록 조장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다른 점이 없습니다. 영리를 위해서건, 병원 행정과 인센티브를 위해서건 환자를 “최대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선 안에서” 적게 보도록 독려하는 시스템이 다름아닌 총액계약제와 질병별 계약제입니다.

총액계약제는 아예 지역단위나 의료기관 별로 들어갈 예산을 정해놓고 그 이상은 못주니 알아서 해라는 시스템이고, 질병별 계약제는 설마 사람이 없는 병을 만들어서 병원을 찾진 않을테니 맹장염 환자가 오면 20만원 그 선 안에서 환자가 입원을 며칠을 하건 합병증이 생겨 무슨 치료를 추가로 하건 알아서 해라는 이야기입니다. 민간의료보험이건 국가의료보험이건 간에 “보험”이라는 시스템을 책정한 이상 이런 방식이 아니면 근본적으로 운영이 불가능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식코와 킹덤은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영리보험이던 유럽선진국들의 국가의료보험이던 간에 다른 나라의 의료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의사들이 의료행위를 최대한 “절제”하도록 독려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건 누가 봐도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일 겁니다. 의료비라지출의 고삐를 풀었다가는 나라재정이 거덜나는 게 요즘 추세라는 건 어느나라나 마찬가지이니까요.

그렇다면, 국가나 의사들 말고 소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떻게 하면 의사들이 열심히 환자들을 보고, 주저하지 않고 고가의 의료장비와 시술들을 밤을 새서라도 최대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선 안에서” 많이 보도록 독려할 수 있을까요? 바로 한 번 CT를 할 때마다 얼마씩 돈을 주는 방식으로 제도를 바꾸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행위별 수가제”라는 것이고, 지금 우리나라가 취하고 있는 보험시스템입니다. 전세계 어디를 봐도 우리나라처럼 전면적인 공공의료시스템의 형태를 취하면서도 행위별수가제를 채택한 나라가 없습니다. 아니, 그럴 엄두조차 낼 배짱이 있는 나라가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덕분에 국민들은 속된 말로 살 판이 났습니다. 병원문턱이 낮아지고 고가의 의료장비라 하더라도 열심히 많이 하기만 하면 되므로 의학적으로 정확한 적응증이 안되더라도 벼라별 핑계를 대고 환자들에 좋은 말들을 해서 환자들의 불편이 없도록 서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법을 어겨가면서 까지 “무료로” 수술을 해주는 곳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시골을 돌아다니며 “무료 백내장 수술 봉사”를 해준다는 천사같은 분들, 열 중 아홉은 범법자들이고, 사기꾼입니다. 안과학회에서도 이런 사람들을 고발한 사례가 있을 정도입니다. 환자들에게는 고마운 존재이나, 사회전체로 보아서는 도둑놈이 되버리는 거죠.

어찌 되었든 결과만 좋으면 다 좋은거니까, 이걸 아주 뭐라고만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실재론 결과도 좋지만은 않으니까 문제입니다. 그냥 좋지 않은게 아니라 심각한 문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인두제를 채택하는 영국의 1인당 병원방문회수가 연 4회인데, 우리나라는 연 14회라고 합니다. 이렇게 고가의료장비를 선호하기 시작하고, 병원문턱이 낮다 보니, 의료비지출 증가율은 oecd 국가중 2위, 평균의 두배가 넘는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가 1,2년 지속된 게 아니라 20년이 넘게 꾸준히 한해를 제외하고 매년 10%이상씩 증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추세가 꺽일 기미가 안보인다는 게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기서 우리 의료시스템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시면서 민영화만은 절대로 안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런 당위에 대해서는 100% 동의합니다만, 그런 당위를 실천하고 동시에 보장율을 올려 의료할인제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서는 과연 얼마나 많은 보험료를 내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해선 전 다른 분들과 생각이 다릅니다.

많은 분들은 선진국평균수준, 그러니까 현재 내고 있는 비용의 두배, 끽해야 세배정도만 더 내면 완전한 국가의료시스템이 정착될 것이고, 지금과 같은 수준의 편이성과 서비스수준을 갖는 의료시스템이 정착될 거라 보시고 있지만, 제 생각으로는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oecd 2위의 의료비증가율을 전혀 계산에 넣지 않고서 하시는 말씀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영국처럼 1년에 14번 병원에 갈 것을 4번으로 줄이고 난 다음에야 현재 의료비지출의 2배정도의 경비로도 국가가 책임질 수 있는 시스템을 시도할 수 있다고 보아야만 합니다.

그걸 하기 싫다면 산술적으로 지금 우리가 내는 의료보험료의 7배를 내야만 보장성 100%의 지속가능한 국가의료시스템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민영화가 영화 식코에 나오는 것처럼 극단적이기까진 아니지만 현재의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의료서비스와 비교한다면 재앙 그 자체라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건 우리들의 호주머니를 가볍게 만드는 보험료의 대폭인상 뿐이라는 건 어찌보면 오해이자 거짓말이라는 걸 인식해야만 할 때입니다. 1년에 14번 갈 병원을 4번으로 줄이고, 그나마 종합병원 4번이 아니라 국가공무원 신분의 의사가 있는 의원급 요양기관에 4번 가는 수준의 불편을 늘어나는 세금증가와 함께 부담할 때에만 가능한 길이라는 걸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무서운 건 앞으로 다가올 지 모를 민영화라는 적 뿐 아니라, 지금 우리와 함께 점점 세를 키우고 있는 행위별수가제라는 암세포같은 존재도 있다는 걸 잊으면 안될 것입니다. 경각심을 쉽게 가질 수 없는 적이 그렇지 않은 적보다 더 무섭나든 건 고금의 진리입니다. 사실, 지난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에서 의료개혁을 시도했음에도 번번히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행위별수가제라는 시스템을 바꾸기에는 국민의 거부감을 도저히 어쩔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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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제일 중요한 부분이고, 제가 하고 싶었던 부분을 깜박 잊고서 써놓지 않았는데요, 미국의 의료보험이 좋지 않고 보험료를 조금이던 대폭이던 많이 내도 좋으니 공공의료를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대세라는 건 압니다. 저도 지향점으로는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있구요. 그러나, 좀 황당하다고나 할까, 현 MB정부가 추진하려고 하는 총액계약제를 마치 민영화의 수순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신의 지혜를 가진 어떤 기적의 마술사가 나타나기 전에는 제대로 된 국가의료시스템과 현행 행위별수가제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히려, 지금같은 추세로 의료비가 증가하는 걸 방치한다면 조만간 의료보험재정이 파탄나서 어쩔 수 없이 서서히 민영화가 대세로 등극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아무리 신뢰할 수 없는 현정권이지만, 민영화의 수순으로 총액계약제를 하고 있다는 식의 근거가 부족한 주장은 가급적 자제하는게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한 선택지는 식코냐 킹덤이냐의 양자택일이지, 둘 모두의 좋은점만 취하면서도 돈은 그리 많이 들지 않는 탁상공론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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