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코라는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영국의 의료보험체제의 실상에 대해 어느정도 알려진 요즘 우리의료보험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나 총액계약제에 대한 인식을 보면서 어떨 때에는 좀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예전 의약분업 때에부터 이미 영국식 의료시스템이나 총액계약제에 대한 이야기는 꾸준히 제기되어 있었고, 당시에는 정부는 그냥 간보는 수준의 의제제기, 의사들은 절대반대, 시민단체들은 절대적으로 해야 한다고 각을 세우며 의사들을 비난하고 정부에게 이들 정책의 조기시행을 압박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떤 입장일까요? 당시에 저는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식 의료체제나 총액계약제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이었고 지금도 이에 적극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총액계약제를 MB정부가 매우 나쁜 의도를 가지고 매우 이상적으로 잘 굴러가고 있는 우리 의료시스템을 말아먹고 민간의료보험을 도입할 목적으로 총액계약제를 실시하려 한다고 인식하는 건 그간 일의 진행사항을 유심히 지켜봐온 저로서는 어이없는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총액계약제에 대한 로드맵은 지난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언급이 되어왔던 사안이었고, 원래 참여정부때 이미 시행하려 했지만 의협과 병협이 적극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계속 유예되어왔던 대표적인 “사회주의 의료정책”입니다.
현재의 의료시스템에서 의학적인 필요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영업상의 목적으로 쓸데없이 낭비되는 의료예산지출이 어떤 것이 있고, 무엇을 절약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보건예산집행이 될 것인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당연히 의사들입니다. 지금까지는 그걸 정말 잘 아는 의사들이 그렇게 예산을 아껴야 할 아무런 동기를 제공하지 않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환자와 국가의 호주머니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오로지 “소신”진료, “교과서적”진료만을 황금율처럼 여기며 당연한 권리라도 되는 것처럼 당연시 해왔습니다.
그래서 다른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건강검진 목적의 MRI, PETCT를 하는 나라가 되었고 의사가 단순 감기환자에게 일상적으로 주사를 놓아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엽기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 걸 국민들은 “혜택”이라 받아들이며 그런 혜택이 사라지는 것을 의료시스템의 “퇴행”이라 여기는 분위기가 요즘 팽배하며 현 정권의 비판의 한 근거로 삼고는 합니다만, 이건 애초에 근본적인 사실이 잘못된 큰 오류이자 비극적인 코메디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의료의 혜택을 차별받지 않고 받을 수 있으려면 의학적으로 절실하게 필요한 최소한의 서비스 수준 이상의 서비스는 철저하게 배제될 수 있어야 합니다. 100명의 암환자를 구하기 위해서는 5명의 돈많은 사람이 건강검진을 위해 MRI, PETCT를 하느라 장비운용경비와 시간이 허비되는 것을 차단해야 하는 거지요.
이런식의 선택은 필연적으로 국민 대다수의 불편과 고통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라 전체를 보아서는 옳은 길이라는 진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가장 큰 고통과 불편을 당할 분들은 시골에서 고생하며 농사를 지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일 것입니다. 이 분들은 병원에서 거의 공짜나 다름없이 무제한에 가까운 물리치료서비스를 제공받고 있으며, 이걸 얼마 안되는 사는 낙으로 여기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총액계약제가 되면 이런 물리치료는 더이상 제공될수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의원에선 환자에게는 얼마 안되는 실비나 무료로 이를 제공하고 반대급부를 국가에 보험으로 청구해서 수지를 맞출 수 있었지만, 총액계약제가 시행되면 이런 식의 영업을 할 수 없으니까요.
이런 식으로 달라질 변화를 생각하면 한이 없습니다. 이건 엄청나게 큰 변혁이자 혁명에 가까운 변화라는 거지요. 그 변화의 폭이 크고, 그만큼 충격은 클 테지만 이건 그동안 우리 의료체제가 그만큼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왔었다는 걸 웅변하는 것이지 현재의 의료시스템이 그만큼 좋은 것이었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의료시스템은 아무런 질병이 없는 건강한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태어난 시스템이 아닙니다. 생명을 상실하거나, 남은 여생을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정도의 상해나 질병을 앓게 된 이들이 살아남고 자신의 모든것이나 다름없는 직장과 가정을 상실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애초의 목적에 부응하도록 기능을 정상화 해야 하는 게 맞습니다. 정치권이 여론무마용으로 갖가지 시혜차원의 서비스를 덕지덕지 갖다 붙힐 수록 의료보험재정의 고갈은 가속화 되고 정작 “가난한 이가 아프면 죽어야 하고, 중산층이 아프면 집안의 기둥뿌리가 뽑히는” 현실은 고착화 되는 겁니다.
현정부가 총액계약제를 2012년에 도입하려는 계획이 언론에 나온 건, 총액계약제를 도입하기 위한 전단계로 포괄수가제(DRG)를 도입하려 했던 참여정부의 고민과 같은 궤에서 나온 겁니다. 현정부가 정말로 민간의료보험을 전면적으로 도입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이런 식의 건강보험재정 정상화를 위한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총액계약제는 쓸데없는 곳에 계속 허비되는 보험재정누수를 막아 조금만 있으면 끝장나게 될 의료보험재정을 유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은 많은 이들이 익숙해져 편안하게 느끼는 지는 모르나, 근본부터 썩어있으며 막장으로 치닫고 있는 시스템입니다. 의료보험제도을 의료할인제도라 비아냥 대는 게 어색하지 않는 한 이 진실은 아무리 해도 가리워 질 뿐, 절대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