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물리교사로 살아남기 – 출처 한국과총

물리교사로 살아남기

2010년 07월 01일(목) 13시 44분 조영주 경복고 과학교사 caritas87@hanmail.net

때 아닌 봄추위가 막 사라지고 돌연 여름 날씨가 찾아올 무렵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한라산 정상에 올라 백록담을 굽어보며 저 얕은 물 속 어디에 괴물이 살고 있겠냐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아이들과 기념사진도 찍고 지친 다리를 서로 토닥여 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행 일정 중에는 몇몇 교과에서 체험학습을 통한 수행평가도 실시했는데 거기에는 지구과학과의 지층 분석과 지질 탐구 활동이 포함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여기까지 와서 점수를 위한 무언가를 해야 하냐며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곧 주변 환경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제법 대견하고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물리과목도 이런 경우 시기적절하고 상황에 딱 들어맞는 재미있는 탐구과제가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요즘 어린 학생들이 즐겨 읽는 학습만화 중에 화산에서 살아남기, 남극에서 살아남기 등 ‘이런 저런 상황에서 살아남기’라는 시리즈가 있다.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하면 생존할 수 있는가에 관한 내용과 더불어 화산이나 남극의 특징과 여러 가지 과학적 상식 등을 재미있게 만화로 풀어놓아 어린 학생들에게 상당히 인기 있는 책이다. 제주도 지질환경을 관찰하면서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들을 토대로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요즘 고등학생들이 과학교과를 대하는 태도, 특히 물리를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물리교사로서 현재의 교육과정 안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과학과목의 학생 모시기

1994년 3월 신규교사 발령을 받고 서울의 한 여자중학교에서 처음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사범대학을 다니며 배웠던 여러 교육학적 이론들이 변화무쌍한 현장에 적용되기엔 턱없이 부족함을 느끼며 허둥대느라 과학수업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돌아볼 여유도 없이 첫 학교 임기를 마쳤다.

두 번째 학교에 부임하고 나서야 교과연구와 수업방법, 과학 특별활동 등에 전념할 수 있었다. 중학교 과학교사로 8년 간 재직하는 동안 과학의 달 행사나 각종 과학관련 대회 등을 통해 가르치고 또 배우며 비로소 내가 과학교사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학생들에게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좀 더 쉽게 가르치려고 노력하며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과학을 ‘공부하고 싶은 과목’으로 느끼게 할까를 많이 고민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다시 신규교사가 된 기분으로 3월 첫 수업을 하던 날은 어찌나 떨리던지 말도 좀 더듬거렸던 것 같다. 그 당시엔 6차 교육과정이 시행되고 있었고, 학생들에게 과학 4개 영역은 모두 입시과목이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매일 교재연구와 수업방법 연구로 바빴지만 학생들의 진지한 수업태도와 노력하는 모습은 정말 많은 힘이 되어 주었다.

곧 이듬해부터는 7차 교육과정이 고등학교 전 학년에 적용되었다. 학생들은 대학 입시에서 과학탐구 4영역 8과목 중 4과목만 선택하게 되었다. 교육과정과 대학 입시제도가 바뀌자 학생들의 태도도 함께 바뀌었다. 물리는 기피과목이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바뀐 교육과정 안에서 학생들이 물리를 외면하지 않도록 고군분투해야 했다.

좀 더 쉽게 좀 더 재미있게 수업하기 위해 자료를 찾고 이런 저런 시도를 하는 동안 다른 과학교과에 비해 물리는 유독 흥미 유발을 위한 자료나 수업 방법 연구가 부족함을 느꼈다. 시각적 효과가 뚜렷하고 다양한 실험이 가능하며 우리 생활 주변에서 쉽게 접하고 적용할 수 있는 다른 과학 영역에 비해 더 많은 사고와 논리가 요구되는 학문적 특성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분명 물리교사들의 노력이 너무나 부족한 탓일 것이다.

첫 고등학교에서 보낸 5년은 이전 중학교에서 보낸 8년 보다 훨씬 길고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아마도 교사로서 이제 무언가 좀 알 것 같아지는 데 8년이 걸렸고, 내 수업에 자신감을 갖고 큰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한 무렵이 이후 5년이었던가 보다. 새로운 학년이 시작될 때 “선생님 전 물리 선택하지 않을 거예요”라는 말로 마음을 아프게 하던 학생들이 연말에 “저 물리 선택했어요. 잘 했죠?”라며 씩 웃고 갈 때는 ‘지난 1년이 헛되지 않았구나’ 생각하며 혼자 기뻐했다. 그런데 요즘은 또 생각이 복잡해진다. 과학은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이 복합되어 상호작용할 때 올바른 사고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학문인데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학생들 모시기 바람이 불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이과를 기피하는 이유

지금 근무하는 경복고등학교는 이과 학생들 숫자가 문과 학생들의 절반쯤 된다. 그리고 3학년이 되면서 물리II 과목을 선택하는 학생은 그 중 3분의 1 정도이다. 올해 교육과정이 개편되면서 문과 학생들이 선택해 배우던 3단위 과학I 과목이 ‘생활과 과학’이라는 2단위 대체과목으로 변경되었다. 결국 이과 학생들만 과학을 공부하는 셈이다. 어느 학교에서나 사정은 비슷하다.

갈수록 이과 학생들은 감소하고 더불어 물리를 공부하는 학생 수도 감소한다. 이럴 때 항상 원인으로 분석되는 대학 입시 제도를 살펴보면 또 그럴 만하다. 언어영역과 외국어영역은 문․이과가 차이 없이 같은 문항과 같은 배점으로 시험을 치르고 수리 영역은 이과 학생들이 월등히 어렵고 범위가 넓다. 탐구 과목도 상대적으로 어렵고 골치 아픈 과학을 공부해야 하니 아무리 대학 문이 더 넓어 유리하다고 해도 이과를 기피하는 경향을 막을 수가 없다.

이런 현실에서 물리교사는 참 어렵다. 경이로운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는 기쁨,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수학적으로 풀어내는 현상의 유려함, 실생활에서 순간순간 발견하는 이론들과 물리적으로 설명하고 결론을 예측하는 희열 등의 즐거움을 알게 해 주고 싶은데 시험에 지친 아이들에겐 여유가 없다. 가끔은 고민하는 학생에게 “점수 받기 쉬운 과목 선택해야지”라고 말하기도 한다.

모든 학생이 물리를 좋아하고 잘 하기를 바랄 수야 없지만 끊임없이 발전하는 미래 사회의 방향은 물리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대학의 정책과 제도가 무언가 해답을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 보다는 제도에 편승하지 않는 교사들의 노력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남에게 보여주기를 꺼려 꼭꼭 닫아두었던 수업시간의 교실 문을 활짝 열고 각자 자기 교실에서 겪는 어려움이나 문제점을 자유롭게 공개하며 토론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보자. 함께 연구하며 누군가 어려움을 호소할 때 ‘나 또한 당신보다 낫지 않다’라는 겸손한 자세로 서로를 도울 수 있는 분위기라면 교사평가도 두려움이 아닌 발전의 과정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그럼으로써 학생들에게 더 다가가는 물리수업도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내년이면 과목수 축소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교육과정이 시행된다. 학교 현실에서는 국, 영, 수를 제외한 과목이 축소될 수밖에 없나보다. 이런 무시무시한 현실 속에서 내가 사랑하는 물리와 물리교사인 나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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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전북대학교 물리교육과 졸업 후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창덕여자중학교, 덕수중학교, 종암여자중학교, 경동고등학교 과학교사를 지냈으며, 현재서울특별시 과학전시관 영재교육원 강사를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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