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인류의 정신적 유산이 크게 세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과학과 종교, 그리고 이데올로기 입니다.
이 세가지 유산은 모두 사람들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제어하는 동시에, 그들의 삶을 규정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이 유산들은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감각에 의존해 인지할 수 있는 좁디 좁은 환경의 틀을 벗어나 이 세계를 바라보고, 자기 자신의 의미를 그러한 우주적인 질서의 한 요소로서 정의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기 자신의 죽음이라는 한계에 절망하고 몸부림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설계자가 있다 없다 이런 차원의 말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엄연한 현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70년 세월이라면 결코 짧은 수명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혼은 70년따윈 티끌과도 같게 여길 영원불멸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과학은 그러한 영원불멸성을 우리를 포함하는 자연의 운행과 이치에서 확인함으로서 자연의 영속성과 자신을 동일시 함으로서 죽음의 공포를 잊게 해 주는 마력이 있습니다.
종교는 그런 과학이 보여주고 규명해주는 자연의 이치만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나 자신, 즉 개개인의 존재로서의 영속성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채워주고 위로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서로 관계를 맺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회의 영속성에 주목하고, 공동체의 특성을 공유하는 한 구성원으로서 한 개체의 죽음을 뛰어넘어 영원히 이어져가는 사회의 영속성에 자기 자신을 동화시키고 자신의 부질없음에 대한 허탈감을 잊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이 세가지 측면은 모두 “영속성”이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으며, 인간의 본능인 영속성에 대한 갈망을 채우는 장치들입니다. 일단 사회생활을 한다면 어떤 사람이든 간에, 이 세가지 장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 세가지 장치는 서로를 배척하고 따로 떨어져서는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과학의 이론과는 전혀 동떨어지는 종교적 가르침은 사람들로부터 놀림감이 될 수 밖에 없으며, 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와 배치되는 과학적 발견은 흔히 무시되거나 폐기되기 일쑤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종교 또한 믿는 신자들에게 사회를 규정하는 이데올로기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채, 사회에서 떨어져 나와 예언자처럼 행세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수많은 비가역적인 변화들을 통해서 발전해 왔고, 이들 장치들 또한 체계화 되고 발전해 왔습니다. 그 결과, 예전에는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던 것들을 이제는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때가 왔습니다. 과학은 과학이고, 종교는 종교라는 걸 부정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된 정신상태를 가졌다고 말하기 어렵게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나, 유독 이데올로기라는 놈은 우리의 정신을 아직도 강력하게 지배하면서, 나머지 두개의 장치들과 구분되기를 꺼려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른바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힌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게 된 겁니다. 최근에 과학이론들을 정면으로 개무시하는 일부 종교인들의 행각이 사회적으로 회자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현상은 사실 종교라는 장치의 과잉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라는 장치의 과잉상태가 아닌가 합니다.
개인의 영속성에 대한 갈구가 아닌, 사회적인 측면에서 관계우위와 헤게모니에 대한 갈구로 시작하는 종교인과 종교행위들이 크게 늘었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욕망에 집착하다 보니, 자신들의 믿음이 마치 과학의 영역을 침험해도 되는 것처럼 말하거나, 개개인들이 모두 다를 수 밖에 없는 신앙의 형태와 방식을 인정하지 못해 배타적이 되고, 종교의 본래 목적이 마치 “우리 세력이 사회에 대한 지배권을 쟁취하는” 정치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도 되는 양 행동하게 됩니다.
그런 건 이데올로기지 종교라고 말해 주기가 껄꺼러운 것입니다. 하긴, 그게 더이상 종교가 아닌 이데올로기니까 종교적으로도 해로울 수 밖에 없으며, 과학적인 이론들을 농락하는 말이 안되는 주장이나 명백하게 거짓말들을 퍼트릴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정말 사실인가 아닌가에 대한 고민 보다는 그런 주장을 퍼트림으로서 “우리”라는 세력을 늘리려는 동기가 너무나 강력하게 작용하고는 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마력입니다.
사실은 과학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데올로기에 기대고 싶어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어떤 한 진영에 안주하는 것이 주는 편안함과 전능감은 강한 유혹이 되니까 말입니다. 뭐니뭐니 해도, 우리는 사회적인 동물이고 정치를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이데올로기도 우리의 본능이자 본질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다만, 그게 너무 도가 지나친 나머지, 다른 영역의 지적 유산들에게 까지 나쁜 영향을 미치고, 전체 사회의 측면에서는 혼란을 야기시키는 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돈이나 권력, 세력이 득세하는 이데올로기 과잉의 시대는 역시 불편함을 감추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