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호접몽 이야기가 정말 공감이 되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한결같이 나오는 꿈 속의 나는 하늘을 날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꾸는 꿈 속에서 나 자신은 거의 대부분 하늘을 납니다. 시나리오는 언제나 다르지만 그 사실은 거의 달라지지 않지요. 전투기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추력에 의해 생긴 양력으로 나는 것이 아니라, 풍선이나 비행선처럼 중력을 거스리며 나는 거죠.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는 그야말로 느리기 짝이 없지만,,,
그렇게 날아다니는 힘을 얻은 상태에서도 가슴팍을 조여오는 불안과 압박은 감히 꾸고 있는 꿈을 깨고 나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날아다닐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아무런 의심이 없이 당연히 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내 모습은 잠에서 깨어난 후에 그렇게나 이상하고 어색할 수가 없죠. 어떻게 내가 날 수 있다고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말이죠.
도저히 나 자신의 의식이라 할 수 없지만, 또 그걸 내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인식이 꿈과 의식 사이에 놓여져 있는 걸 실감하는 건 잠에서 막 깨어난 순간일 겁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할 때마다 항상 생각하는 게, “나”라고 불리워지고, 인식되는 존재에 대한 의심입니다. 이런 의심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한 순간도 확신을 가지고서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사는게 불가능하겠죠.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최고의 순간, 무엇엔가 열중하고 들떠 있어서 집중하고 있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이런 나라는 존재, 그런 존재를 나라고 인식을 하고 있는 인식의 진실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게 사람의 숙명, 아니 다른 사람의 속은 알 길이 없을테니 저 자신의 숙명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존재에 대한 의심이 언제나 제 인생을 나쁜 쪽으로만 끌어내리는 건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강고한 확신이 사라지는 대신, 언제든 나 자신의 판단이나 감정, 가치관이 틀릴 수 있다는 “겸손”을 끄집어 낼 수 있기 때문이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확신하지 못하는 자아를 주제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인생에 주어진 하나의 축복일지, 아니면 저주일지는 지금으로선 알 길 없지만, 그러한 확신 부족한 정체감이야 말로 그대로의 나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으로 언제나의 상념에 결론을 짓곤 합니다.
잠을 잘 못잤는지 아침부터 멍하니 제대로 깨어있지 못한 상태로 지내다 써본 뻘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