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전세난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수급 불균형이 심한 것도 아니고, 가격이 크게 오르는 것도 아닌데도, 매매가 활발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전세까지 구하기 힘들다 보니 세입자들의 고통은 이만저만한 게 아닙니다.
전세가격은 정부가 물가를 산정할 때 가중치가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전세 6.64%에 월세 3.11%를 합치면 물가상승의 근 10%에 달하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변수입니다. 그만큼 서민들의 고통을 곧바로 반영하는 수치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은행은 집을 사느라 돈을 빌려간 사람들의 이자부담이 늘어날까봐 금리인상과 같은 물가억제책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금의 물가는 원자재 가격의 상승에 기인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공급자 물가를 잡는 데 중요한 환율이 내려가도록 자연스레 놔두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수출이 급감한다며 거의 노골적으로 환율을 조작하면서 미국에서는 한국만 콕 찝어서 환율조작국이라고 지적하는 걸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만큼 현정부는 “성장”이라는 거시경제지표의 숫자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집착하는 것은 거시경제지표마저도 지난 정권들을 능가하지 못한다면 국민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이런 정책에서 가장 큰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서민들입니다. 당장 물가가 이만저만 올라가는 게 아닙니다. 금리가 올라가면 빚을 진 사람들에게는 해피하지 않은 일일테지만, 어차피 서민들이 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는 건 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중산층 이상이 아파트를 구입하기 위해 빚을 진 건데 서민들을 위해서 은행금리를 동결하거나 지금처럼 꼼지락거리며 올리는 건 어디까지나 중산층 이상을 위해서이지 은행융자완 별 상관이 없는 서민을 위해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다른나라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수많은 꼼수와 유도리로 언젠간 터질 모순들을 봉합하며 유지되어 왔던 사회입니다. 대표적인 게 전세계약입니다.
전세라는 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성립될 수가 없는 형태의 계약입니다.
집 주인 입장에서는 자기가 구입한 가격을 훨씬 밑도는 가격으로 세입자에게 주택의 사용권을 무기한 넘겨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빌려주는 동안 집은 내구연한이 계속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감가상각비도 집주인이 부담해야 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미친” 집주인이나 이런 계약을 체결할 겁니다.
마찬가지로 세입자의 입장에서도 이런 미친 계약이 또 없습니다. 거의 집을 사는 가격에 준하는 엄청난 돈을 대출을 받아서라도 일시불로 집주인에게 지불하는 건 엄청난 리스크를 수반하는 모험입니다. 그 돈이 떼이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요즘이야 세입자를 지켜주는 법들이 많지만 지금도 이런 법망을 빠져나가는 집주인은 어디서든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돈이면 차라리 집을 사는 게 정상인데도 많은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전세를 택합니다.
이런 집주인 입장이나 세입자 입장 어디를 봐도 미친 짓이 지극히 합당하고 건전한 상호합의와 보편적인 계약형태로 유지될 수 있었던 건 단 하나, “반드시 집값이 오른다”는 믿음을 양자가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값의 절반 정도만 돈을 마련할 수 있다면, 모자라는 돈은 전세를 내주어서 대출부담을 줄일 수 있고, 어차피 나중에는 집값이 오를테니 전세자금을 돌려주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거죠. 게다가, 은행에 돈을 맡기기만 하면 쏠쏠한 이자를 챙길 수 있으니 굳이 세입자들과 달달이 실랑이를 벌여가면서 월세를 내주지 않아도 되는 거구요. 세입자 입장에서도 몇년만 지나면 집값이 내가 내준 전세금보다 몇 배로 올라있을 것이니 설마 집주인이 잘못 되더라도 자신의 전세금을 변제받지 못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현금의 가치와 자산가치가 동시에 상승하는 기적같은 경제성장이 보여준 마술과 같은 거래인 거죠.
그러나, 이제는 현금의 가치, 즉 예금금리도 형편없는 수준으로 추락했고, 자산가치도 올라갈 거라는 확신마저도 산산이 부서진 상황이 도래했습니다. 명백히 “성장신화”는 끝장이 난거죠. 이제 사람들은 성장기의 진통제와 마취제에 의해 잊고 있었던 고통을 그대로 체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성장의 종언은 지난 참여정부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정권 탓이 아니라, 더 이상은 성장이라는 게 산술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 온거죠. 그 명백한 증거로서 2005년부터 7년간 단 한 주도 빼지 않고 연속적으로 전세가격이 상승한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단 한주도 쉬지 않고 오르기만 하는 전세가격이 상징하는 건 이제 예전과 같은 rule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걸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있습니다.
요즘 부동산 매매거래가 실종한 이유는 아직 이걸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과 이런 조류를 알아채고 인지하기 시작한 사람들 사이에 의사결정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전세가격은 여전히 7년째 연속 올라가는 상승곡선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성장신화가 끝났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게 되겠죠.
이제 더이상 전세라는 형태의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게 될 때가 머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변화가 지금 당장 오지는 않겠지만, 정말 도둑같이 급격하고 많은 이들이 미처 대응하지 못하는 형태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오면 전세라는 건 서울 일부지역을 제외하면 거의 사라지게 되겠죠. 적어도 10-15년 후에는 실현될 일이라고 감히 예측해 봅니다.
요즘 심각한 청년실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이상 성장으로 인해 모든 모순이 봉합되는 진통효과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보여주는 지표가 요즘의 청년실업입니다. 김영삼 정권 이후 엄청나게 불어난 대학교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른바 고급인력들을 받아줄 기업의 문은 더이상 예전과 같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청년실업이 생긴 원인입니다. 다른 게 없어요. 결코 정권이 무능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청년실업은 유시민이던 심상정 노회찬이던 결코 막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성장기조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IT도 좋고 BT도 좋고 신성장동력도 좋으며, 웃기는 4대강도 이해야 가는 이야기입니다만, 이런 신산업이 심해지는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작금의 “고용없는 성장”이 고용을 해결해 줄거라는 주장만큼 코미디가 또 없는 거겠죠.
정말 문제는 이제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숙제들, 지금까진 우리가 무시하고 지나쳤던 숙제들을 다 풀고 나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결코 무시하고 지나갈 수가 없어요. 현 정권이 망해가고 있는 이유가 예전처럼 성장 하나로 모든 문제를 무시하고 묻어둘 수 있을 거라 착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가가 살인적으로 오르게 생겼는데도 금리를 올리고 환율을 조작해서 인위적으로 올리는 걸 그만두지 않는 것이 이제 정권 말이 되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게 될겁니다.
그게 정권 말이 될 지, 아니면 다음 정권 초가 될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지난 김영삼정권 때의 IMF와 비견되는 파국이 올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이 국민을 속이거나 호도하지 말고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더 이상은 성장율이라는 지표에 얽메이지 말고, 서민생활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조치들을 해나갈 수 있어야죠.
가장 급한 게 신용불량자 같은 제도를 폐지하고, 확실하게 회생할 수 있는 개인파산제도를 만드는 것, 앞으로 숙명적으로 급증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실업자들이 인간의 존엄만큼은 유지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제도, 중산층이 더이상 노후의 경제적 위기에 대한 공포감으로 소비를 줄이고 재테크 같은 불로소득에 기대어 젊음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는 안정적인 연금제도 등과 같은 걸 “경제성장율지표의 추락”이나 “재정적자의 증가”를 감수하고서라도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은 물론, 민노당이나 진보신당도 안타까운 인식들을 내보일 때가 많습니다. “성장”을 포기하고 “안정”을 선택한다는 자세가 아니라 자기들 말대로 민생을 살리면 성장도 담보할 수 있다는 식의 바람잡이식 구호들이 더 많이 목도되는 걸 보면 말이죠. 물론, 국민 대다수의 염원이 아직도 경제성장이라는 것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죠. 그만큼 마약처럼 투여되어 왔던 성장신화가 사라진 직후인 지금처럼 금단증상이 심한 시기는 없을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기에 성장이라는 다시는 오기 힘든 지나버린 시대에 대한 향수를 거부하고 깨울 용기를 가진 정치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려움에 처한 서민들의 고통은 더욱 늘어만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렇게 되기란 정말 불가능에 가깝고 고작 한나라당의 패악질을 심판하고 정권교체를 실현하기 위해 고만고만한 야당들이 서로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참아가며 연대와 연합을 모색하는 게 지금 당장의 현실이지만, 마냥 꿈꾸는 게 그대로 이루어지는 게 가능하다면, 그런 솔직한 정치지도자가 나타나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