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증례 하나

최근에 제가 다니는 병원에 90세가 넘는 어르신께서 응급실을 내원했습니다.

골반쪽을 다치셔서 누운 채로 오셨는데, 통증 외에는 별다른 이상징후도 없고, 환자분을 데려온 분의 차가 후진을 하다가 엉덩이쪽을 부딪혀서 오셨다고 설명을 했다더군요. 환자분도 그 말이 맞다고 하시구요. 응급실에서 체크했던 생명징후도 별다른 이상소견은 없었기에 통상 하던 대로 골반뼈 사진을 찍고, 기초적인 검사를 맡긴 후에 응급실에 누워 계셨죠.

그런데, 골반뼈 사진을 보니까 좀 석연치 않은 게 치골(골반 뼈의 가장 앞부분)에 골절이 있는데 양 쪽이 모두 부러졌더라구요. 자동차가 후진해서 그 속도에 다쳐 넘어질 정도로 치골이 양쪽 다 부러지는 건 생각하기가 힘든데,,, 사실 여기에서 좀 더 경각심을 가지고 대처했더라면 안타까운 일을 막을 수 있었을텐데,,,,

여하튼 생각했던 것보다 심하게 골반뼈가 부러진 이유는 나이가 많으시고 골다공증이 정말 심한 상태였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생각하고 넘어가려는데, 갑자기 환자의 항문에서 피가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이렇게 다친 환자에서 항문에 피가 나왔다는 건 내출혈일 가능성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곧바로 CT를 찍었죠. 이렇게 응급실에 와서 CT를 찍게 되기 까지 1시간이 채 안됩니다.

그런데, CT영상을 본 제가 깜작 놀랐어요. 앞서 치골 골절만 있는 게 아니라 골반 뒤 쪽에 골반뼈와 척추뼈를 연결시키는 부위까지 깨져서 벌어져 있는 거에요. 이 정도면 사망율이 확 올라가는 치명적인 골반뼈 손상이고, 그냥 자동차가 후진을 해서 되는 정도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손상인 거지요. 당장 막대한 출혈로 인해 사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항문에 피가 나온 것도 혈복증 같은 게 아니라 골반뼈의 복합골절과 동반된 손상에 의한 것 같더군요.

이 필름을 보고 판독을 해준 지 불과 20-30분 도 안되어서 갑자기 환자의 혈압이 떨어지고 수혈을 해 줄 틈도 없이 쇼크에 빠지더니 바로 사망하시더군요.

대게 대량의 출혈이 발생하면 먼저 생명징후에서 심장박동수가 빨라지는 빈맥증이 먼저 온 다음에 혈압이 떨어지고 쇼크에 빠지는데 전혀 그런 징후 없이 바로 쇼크에 빠지신 겁니다.

말가그니 골절이라고, 이런 식의 골반골절은 원래가 치사율이 높은 중대한 손상이고, 제대로 처치를 해도 사망할 확률이 아주 높은 증례입니다. 그러나, 의사들이 아무것도 손을 써보지 못하고 이렇게 황망하게 환자를 죽게 해버린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다름아닌 환자와 보호자의 말을 그냥 의심없이 믿었다는 것이겠죠. 나중에 알아보니 환자가 그렇게 거짓말을 한 이유는 사고를 낸 가해자이자 자신을 데려온 보호자가 잘 아는 친척 조카였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것 말고도 반성해야 할 건 환자가 보여주는 생명징후 같은 기초적인 이학적 소견을 너무 과신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골반사진을 판독하던 당시 척추뼈와 골반뼈 사이가 아주 약간이나마 벌어졌던 소견을 크게 의미를 두지 못하고 그냥 넘어간 것이 되겠습니다.

당시 골반사진에 보였던 의심소견은 영상의학과 전문의인 저로서도 간과할 수 있을만큼 미세한 것이었고, 곧바로 CT를 찍었던 터라, 오히려 판독 순서가 나중에 찍은 CT를 먼저 판독하게 된 상황이어서 이걸 가지고 임상의사분을 탓할 수도 없을 만큼 정말 운이 없고 안타까운 거였습니다.

이렇게 환자의 증상이나 진술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것은 이런 식의 오판으로 야기될 가능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현재 한의학이 극복해야 할 당면한 한계를 제시한다면 환자의 진술이나 간단한 이학검사에 대한 의존도가 아직도 많이 높다는 점을 들 수 있겠죠.

흔히 한의학의 우수성을 설명하는 데 쓰이는 근거가 수백년의 임상경험으로 축적된 통계자료를 드는데, 그러한 경험만 쌓이는 게 아니라, 환자던 의사던 각자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생기는 오차의 일종인 바이어스 또한 그 경험의 깊이만큼 크고 깊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선 객관적으로 그런 경험을 활용하는 게 불가능하죠. 결국 그러한 바이어스들이 오류를 초래할 수 밖에 없는 거고, 현대의학의 여러 발견들에 의해 그런 오류들이 확인되는 과정 속에서 한의학이라는 학문체계가 도전을 받게 된 거지요.

그래서 이런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한의학의 발전을 위해, 많이 고민하는 분들 또한 많이 계신 것으로 압니다. 저는 그런 고민을 하는 한의사분들이 더 많아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아직 한의학이 그렇게까지 전망이 어둡거나 배척해야만 할 건 아니라고 봅니다. 현대의학이던 한의학이던 자만하는 그 순간 자신이 환자를 죽이거나 병을 더 키우는 흉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잊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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