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분들께 바라는 점

사실, 저는 한의사 분들이 의사나 의학을 향해 하고 싶은 걸 기탄없이 의사들이 듣고 또 고려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그런 목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사의 입장에서 무조건 한의학은 안돼 이런 식의 배척이 아닌 생산적인 관점에서 하고픈 말들도 있고 말이죠.

일단 전제해야 하는 건, 의사들이 조심해야 하는 부분들에 대한 겁니다. 한의사라는 직업과 면허는 절대적으로 존중되어야 하고, 한의학이라는 것의 존재가치 또한 절대적으로 일단 존중되는 걸 전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의사라는 직업도 나라에서 독점적으로 부여하는 의사면하증의 권위가 아니면 성립될 수 없는 것과 똑같이 한의사라는 면허와 직업으로서의 권위는 존중해야 합니다. 그것을 여하한 이유에서건 부정하는 순간, 의사로서의 권위 또한 스스로 부정하는 거라는 것을 생각해 봐야죠.

그리고, 한의학이라는 학문체계 자체에 대해서도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학교육에 엄연히 의대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의대가 있다면, 현대의학과 한의학은 사회적으로 평등한 위치와 권위를 부여받게 된 겁니다. 그 과정이나 각자가 생각하고 잇는 정당성이 어떻든 간에, 자기가 믿는 의학에 대한 소신이 어떻든 간에 상관없이 국법의 권위에 의해 보호받고 장려육성되는 학문이라는 차원에서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는 건 금기가 되어야 합니다.아무리 각론에 들어가서 의사와 한의사가 부딪히고 싸우더라도, 이런 각자의 직역만큼은 반드시 존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도 의료일원화가 앞으로 필요하다 보지만, 그건 먼 훗날 이야기이고, 지금은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현실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그런 전제조건을 달고 난 다음에 제 개인적으로 한의학의 발전방향이 이런 쪽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적어봅니다.

첫 번째는 의료기기의 사용에 관한 겁니다. 오늘 차한잔에서 최근 겪었던 증례를 올렸었습니다만, 한의학이 지금 벽에 부딪히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환자의 주관적인 증상이나 오차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간단한 이학적 검사들 만으로는 진단에 만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한의학의 관점에서 관영찰색을 살펴보는 것이든 진맥을 잡아보는 것이든 결국은 사람의 몸을 인간의 감각기관을 동원해 보는 것이고, 인간의 몸이 무슨 기계가 아닌 이상 모든 병리적인 현상에서 정확히 일관된 패턴으로 맥이 잡히거나 무슨 소견이 나올 이유는 없죠.

일정하기만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기초적인 맥박과 혈압도 일정하지 않고 제가 쓴 증례에서처럼 보편적인 원칙을 벗어나 의사들의 뒤통수를 치는데, 하물며 진맥이나 모습을 살펴보는 게 100% 일관되리라는 건 더더욱 말이 안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라도, 한의학의 발전을 위해 최신진단장비를 활용하려는 시도는 당연한 수순일 겁니다.

그러나, X 선장비나 CT, MRI같은 장비는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장비이기 이전에 상당한 고가의 장비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아예 나라에서 이런 장비를 함부로 설치하거나 운용하지 못하게 규제를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억울한 게, 영상의학과 전문의도 마음대로 CT, MRI를 설치하지 못합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일단 시행한 검사에서는 최대한 환자가 돈을 낸 만큼의 성과를 얻어가도록 하는 게 환자에게 도리가 될 테지요. 그런 검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될 신장암이나 임파선종양, 폐암 같은 걸 모르고 지나간다면 환자에게 그만큼 억울한 일이 없을 겁니다. 한의학에서는 일반적인 적응증과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이런 장비들을 가동하려는 걸로 압니다. 그건 한의학의 입장에서는 발전을 위한 단계이지만, 국가의 입장에서는 낭비가 될 수 있고, 환자의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일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 되는 거죠.

단순한 X선장비라고 가볍게 보시고, 의사들만큼만 배우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도 봤습니다만, 그게 그리 간단한 게 아닙니다. 특히 폐렴같은 간단할 거 같은 질환도 그렇습니다. 일 주일에 한 두 번 정도는 임상 과장님들이 직접 찾아오거나 메신저를 통해 영상에 대해 물어보고는 하시는데, 그 중 단연 많은 게 폐렴에 관한 겁니다. 도대체 영상 어디에 폐렴병변이 보이느냐고 묻는 게 제일 흔한 질문내용입니다. 판독을 할 때에는 정확히 어느 부위라고 기록을 해 주고, 청진을 통해 그 부분이 미심쩍다는 걸 확인해 놓고도 정작 영상을 보면 깨끗해 보여 헷갈리던 차에 판독이 그렇게 나오면 공부를 하려고 저를 찾아오는 거죠.

사실, 이렇게 잘 찾아봐야 하는 부위는 다 정해져 있고, 그걸 찾아내는 원리도 실루엣징후라고, 대학교 다니면서 지겹게 배우는 겁니다. 그걸 다 배우고, 임상에서 수천명의 폐렴환자를 봐도 정작 영상을 보면 애매하거나 찾아내질 못해서 가끔씩 저와 상의를 하는게 일상다반사에요. 그래서 일반 의원에서도 자주 놓쳐서 오는 게 폐암이나 폐렴같은 비교적 흔한 질병입니다.

기왕에 장비를 운용한다면 환자들이 돈을 내고 검사를 했는데도 이렇게 놓치고 지나갈 수 있는 일들이 안생기게 하는 게 중요하겠죠.

물론, 열심히 하는 한의사분들의 열정은 항상 높이 삽니다. 훑어봤던 여러 초음파에 관한 책들 중에 가장 알기 쉽게 써졌다고 생각하는 책의 저자가 한의사분이라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지금은 몰라도 예전엔 많은 의사선생님들이 초음파를 배우면서 제일 먼저 찾는 책의 저자가 한의사라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봐요. 노력하고 겸손하고, 열린 마음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둘 째는 한의학의 신뢰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서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독성간염 때문에 최근까지도 의사와 한의사들 사이에 감정적으로 앙금이 쌓인 것은 다들 아는 바 입니다. 의협에서 너무 선정적으로 나간 면도 있고, 한의사분들이 억울해 하는 점들도 있는 것 분명합니다. 다만, 의사들의 고충도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모든 종류의 간염바이러스나 감염이 될 만한 원인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갑작스럽게 간수치가 올라가고, 환자가 상태가 안 놓아져서 오면, 일단은 독성간염이라 보고 치료를 들어가게 됩니다.

이런 독성간염의 원인물질은 솔직히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환자들은 어떤 물질에 노출된 것인지 결코 제대로 알려주는 법이 없습니다. 환자 본인도 전혀 모를 수 있고, 알고 있어도 프라이버시나 여하한 이유로든 말을 안할 수도 있십니다. 우리가 통상 먹는 식품들 중에서도 많이 먹으면 간염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들도 있고, 심지어는 치료를 위해 먹는 약 때문에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의사들은 한약을 먹었다는 진술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메달릴 수 밖에 없는 거죠. 문제는 해당 한의원에서 한의사가 조제한 한약이 정말로 독성간염을 일으킬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보증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제조과정 중에 농약이 있을 수 없다는 보증, 해당 약제들의 정확한 레시피와 함량표가 있어서 이것들로는 독성간염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보증,,, 이런것들이 제대로 되어 있다고 한다면야, 의사들도 안심하고 한약을 용의선상에서 빼도 되는 날이 오겠지요. 이건 의사에게도, 한의사에게도, 그리고, 환자에게도 해피한 결말일 겁니다. 물론 이렇게 하려면 현실적으로 큰 비용과 내부적인 반발이 오겠지요. 한약조제에 들어가는 비용도 천정부지로 상승할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를 한의학계에서 먼저 시작하지 않는다면 결국 문제는 해결될 수가 없는 거죠.

결국 중요한 건 의학이냐 한의학이냐가 아니라 단지 하나,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그 신뢰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들은 많고, 솔직히 의사인 저 자신도 의사들이 이 신뢰를 위해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버릴 수 있을 지 의문스러울 때도 있긴 합니다만, 닥치고 신뢰 하나만 생각하는 것이 환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기회가 되는 대로 의사로서 의사 안에서 신뢰를 잃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서도 쓰고 싶은 마음이 있고, 지금껏 몇가지 그런 것들을 글로 쓰기도 했는데요, 이게 쉽지 않다는 것을 저도 여실히 느끼고 있기에 이런 노력을 쉽게쉽게 입에 올리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건 압니다. 다만, 어제부터 갑자기 불어닥쳐온 한의학 논쟁이 아무런 열매 없이 감정싸움으로만 끝나는 건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길고 지리한 글 올려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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