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 비판에 대해서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요즘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습니다.

책을 읽기 위해 일부러 동영상을 보지 않고 있지만 저자인 셸리 케이건이 직접 강의하는 동영상이 유투브에도 나와있다고 합니다. 관심있는 분은 동영상을 봐도 책의 내용을 읽은 것과 같은 효과를 얻으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앞의 4분의 1 정도까지 읽었는데, 책의 주된 내용은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대와 중세 때 부터 유신론에 기반한 이원론적인 관점과, 이에 대립하는 유물론에 입각한 물리주의적 관점을 소개하고, 확고한 물리주의자인 저자의 입장을 설명하고 설득해 나가는 과정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종교인이긴 하지만, 이성에 입각해서 인간 스스로를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려는 시도를 지지하고 찬성하기 때문에 책을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단, 저자가 논증해 나가는 이원론 비판 중에서 세부적으로 생각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어 글을 써 봅니다.

이원론자가 인간의 비물질성(물질성이라는 용어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 아니라, 결정론적인 물리법칙에 완전히 귀속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이원론자는 영혼이라는 비물질성, 즉 물리법칙에 귀속되지 않는 자유의지에 속한 부분이 인간의 육체 안에 깃들어져 포함되어 있다는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물질성에 대비되는 용어로 비물질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을 “자유의지” 라는 개념을 들어 변론하는 부분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이원론자가 인간의 비물질성을 내세우기 위한 논증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더군요.

1.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
2. 결정론(물리법칙)에 지배받는 존재는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다.
3. 순수하게 물리적인 존재는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다.
4. 그러므로 인간은 순수하게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모든 이원론자들이 이런 논리전개를 가지고 인간의 비물질성을 옹호하는 건 아닙니다. 적어도 저는 종교인이자 아직까지는 이원론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런 전개를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당연시하거나 인간의 비물질성을 옹호하는 게 아닙니다.

많은 물리주의자들이 1-4번의 명제를 모두 반박함으로써 이를 비판하고 있지만, 셸리 케이건은 3번 명제가 사실과 다르다는 설명으로 이러한 논리전개를 비판합니다. 즉 순수하게 물리적인 존재라 할지라도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 건 아니라는 걸 역설하는 거지요.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을지 모르나, 그 근거로 양자역학을 제시하는 건 잘못된 근거제시라고 봐야합니다.

양자역학에서 불확정성이론이라는 건 미시세계에서의 확정적 관측의 불가능성을 표현하는 이론이지, 물리현상이 본원적인 불확정성-확률성에 기반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걸 셸리 케이건은 간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시세계에서 물리현상을 예측할 수 없는 이유는 관측불가능한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기는 한계이지, 물리현상 자체가 확정적이 않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3번 명제, 즉 “순수하게 물리적인 존재는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다”는 명제가 틀렸다는 주장의 근거로 양자역학을 제시하는 건 오류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통합하려는 물리학의 시도가 초끈이론인데요, 이 초끈이론이 예측하고 있는 것들을 보면 이러한 불확정성원리가 결코 물리법칙의 결정론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우주가 3차원공간이라 체감하고 있지만, 그 3차원 공간 말고도 매우 미시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영역에 불과하지만 전혀 다른 차원이 존재하며(총 9차원 공간이라 계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제한된 영역의 다른 차원 공간을 미시입자들(소립자) 만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관측불가능한 부분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런 관측불가능 영역 안에서도 결정론적 물리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에 결과론 적으로는 일정한 확률분포곡선에 의해 규정되는 불확정성이 포함된 결과를 관측하는 거구요.

애초에 “결정론”이라는 말 자체가 예측가능하다는 관측자의 관점에서 나오는 개념이 아닙니다. 관측자가 아닌 설계자의 관점에서 결국에 벌어지게 되는 미래(물리현상의 결과)를 설명하려다 보니 결정론이냐 아니냐 하는 말싸움을 하는 것일 뿐, 현재시점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상을 관측하는 우리 인간의 관점과 시각에서는 결정론이든 확률론이든 모든 미래를 예측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게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셸리 케이건의 이원론 비판이 완전하지 않다고 해서 해당하는 이원론이 자동으로 성립되는 주장인가,,, 물론 그건 아닐 겁니다. 제 경우는 저 4가지 명제 중에서 2번 명제가 오류가 있다고 지적을 하고 싶습니다. 즉, 결정론에 지배받는 물질적 존재라 할지라도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주장하고 싶다는 겁니다. 애초에 결정론이라는 것이 바라보는 관점은 미래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현재의 현상을 기술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이 현재 우리들을 인식하고 바라보는 태도에 관한 개념이라고 봐야 정확합니다. 두 개념은 서로 대척점에 서있는 게 아니라 전혀 별개의 개념이자 양립가능한 개념으로 봐야 합리적이라는 생각입니다.

과학과 신앙이 양립가능한 것과 같이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공존할 수 있다는 관점을 셸리 케이건은 양립주의(compatibilism)이라고 표현하고 있더군요. 그러한 양립주의가 참이라고 한다면 전통적인 이원론이 성립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셸리 케이건은 양립주의에 대한 논박을 보류하고 전통적인 이원론 비판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런 길고 지리한 논쟁과 사변을 책을 읽어가는 내내 강요받게 될 것 같지만, 이러한 작업은 신앙인에게나, 신앙을 부정하거나 공격하려는 무신론자에게나 모두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서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양 측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공통의 언어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러한 공통의 언어가 다름아닌 철학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사람이 깨어있기 위해서는 철학이 필요한 거라는 생각이 들고 그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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