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물생심

1.

제가 차를 산 지가 6개월 정도 됩니다. 이제 2만2천키로 뛰었으니 새 차라고는 못합니다만, 차를 사면 특별한 사정 없으면 10년은 타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지라, 마눌님 차도 산 지 3년 정도 밖에 안되어서 당분간은 차를 사거나 고를 일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 타고 있는 차는 제 인생에서 제가 직접 선택한 최초의 차이고, 그만큼 애착이 있습니다. 타면서 불만을 느낀 적도 아직까진 없구요. 그런데, 자꾸 마음 한 켠에서는 1억이 넘어가는 고가의 차를 몰고 다니는 나 자신을 꿈꾸기 시작합니다.

2.

이런 망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생각해 보니, 집 앞 까페에 가끔씩 들리면 펴보게 되는 자동차잡지를 읽게 되면서 부터인 것 같습니다. 의식적으로는 더 이상 자동차를 구입할 여력도, 이유도, 현실적으로 제가 그런 결정을 내릴 어떤 가능성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무의식의 영역에서 멋지구리한 자동차에 대한 욕심같은게 요즘 부쩍 커지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만 그런 게 아닌게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그렇게 다양한 외제차들을 보지 못했는데, 최근 아파트 주차장을 보면 마세라티, x6, 재규어 XJ 신차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바로 옆 아파트인 SK뷰에서는 포르쉐 마크를 단 SUV(카이앤인가요? 아님 카이맨?)이 한 대도 아니고 두 대가 보이더군요. 그 차 가격이 기본으로 1억 8천을 상회한다는 것을 최근에 알고 식겁했습니다만, 오토캠핑 갈 때 마다 짐이 늘어가면서 해치백만 가지고는 언젠가 한계에 부딪힐거 같다는 생각을 할 때 마다 왜 그게 생각나는 지 깜작 놀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3.

원래 저는 연비같은 거 그냥 씹어먹으면서 차를 모는 타입이었습니다. 한 달에 60만원이라는 주유비에도 그리 큰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높아진 연봉에 비하면 그 정도는 감내할 수준이었거든요. 그런데, 차를 바꾸고 난 지금의 시점에 와서는 어떤 차가 연비가 잘 나온다더라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 집니다. 해치백 중에 120d나 118d가 무게배분이 환상이라더라, 벤츠에서 곧 나올 CLA AMG의 마력이 어떻다더라,,, 지금 제 차의 마력도 제대로 소화해 본 적이 없는 내가 왜 그런 차를 계속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을까, 당혹스러운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게 다 지금 제가 몰고 있는 차에 대한 자기만족감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무의식의 기제가 아닌가 스스로 분석해 보고는 합니다.

아마, 제가 연봉이 지금보다 조금 더 높았거나, 부모로부터 재산을 많이 물려받은 상태였다면 지금쯤 그런 무의식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채 포르쉐는 아니어도 국산 SUV나 왜건을 추가로 지르거나, 올해 말 쯤이면 나와있을 CLA AMG버전을 지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런 지름이 저를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도, 무언가 평안한 상태에 이르는 데 도움을 주지도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4.

지금 몰고 있는 차를 사게 된 것도 냉정하게 따져보면 허영심의 발로가 조금이나마 섞여 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애초에 렉서스 RX450h 내지는 GS나 ES 쪽을 최종적으로 고민하고 있었으나, 갑작스런 예산축소로 인해 구입하게 되 경위가 있습니다. 물론, 시승과 철저한 계산이 있었지만, 같은 급으로 현대의 i40도 좋은 평을 받고 있는 차이고, 가격대로 봐도 좋은 국산중형차가 있음에도 그걸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름아닌 브랜드였습니다.

렉서스 브랜드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오피러스에서 더 좋은 차로 간거라는 걸 납득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심히 복잡난해하고 껄끄러운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납득시켜야 할 대상이 보기엔 6천만원대의 볼보 보다도 4천만원대의 렉서스가 훨씬 더 품격있는 선택으로 인식되는 그런 아이러니한 측면이 있더군요. 그것 때문에 참 마음에 들었었던 올란도나 xc70이 선택 직전의 상황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었는데, 오토캠핑용 짐이 늘어날 때 마다 이게 마음이 아픕니다.

5.

지방 종합병원은 계절을 많이 탑니다. 농한기 때 어르신들이 몰려들기 때문에 겨울 내내 정신이 없습니다. 정말 힘들고 지쳐서 손목에 힘이 안 들어갈 정도로 초음파를 하고, 판독을 하느라 하루에 자판기 커피만 7잔 이상 마셔대야 겨우 일을 할 수 있겠더군요. 그런데, 어느샌가 일이 힘들어서 피곤하니까 커피를 마시게 된 건지, 커피를 그렇게 마셔대니까 컨디션조절이 안되어서 피곤한 건지 헷갈리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환자가 많이 줄었기 때문에 오늘은 근무시간 내내 커피를 마시지 않고 한 번 참아 봤습니다. 컨디션 조절이 커피 마실 때 보다 더 쉬워지더군요. 물론, 일이 줄어서 덜 피곤해 진건지, 커피를 줄여서 그리 된건지 과학적으로 따져보는 거야 불가능하겠습니다만, 내일부터는 확실히 커피를 줄이든지 끊어야 겠다는 생각과 함께 변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습니다.

6.

자동차에 대한 지금의 제 마음도 그런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 제가 디자인이 멋지고 평이 좋은 자동차들에 정신이 팔려 있다고 해서 그런 자동차를 향한 꿈과 열정이 내 삶을 조금이라도 더 좋은 지경으로 인도해 줄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일과에 집중하는 걸 방해하는 측면이 더 많아진 게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피곤하고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자동차 사진이나 동영상을 봐왔던 지금까지의 패턴을 바꿔보는 것이 지금 내가 취해야 하는 결단이겠죠. 제 차가 오토캠핑용 짐들을 다 실을 수 없는 때가 다가온다면 그냥 제 차로 안가고 조금 더 큰 차를 어떻게든 빌려서 캠핑을 가면 될겁니다. 아니면 그냥 캠핑 짐을 더이상 안 늘리는 방향으로 모색을 해 보던가요.

제가 선택한 이 작은 해치백은 스스로 생각해도 딱 저 다운 차라고 생각합니다. 출퇴근이라는 기본기능을 가장 호사스러우면서도 편안하게 수행하기 위해 모든 것이 여기에 집중해 움직이는 미니멀리즘의 구현에 가장 충실한 개념의 차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차 선택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가는 생각하지 않고 7년 20만키로를 채워볼 생각입니다. 내일 부터는 자동차에 대한 관심을 오토캠핑이나 주말에 다녀올 국내 여행지로 어디가 좋은지 알아보는 것으로 돌려보는 걸 커피 끊는 것과 함께 시도해 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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