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형 소송의 최후

클리앙 이럇이럇님의 칼럼 내용입니다.
http://www.mucheon.com/page2/page49/page52/index.html

 


 

변희재씨에게 내려진 실형을 보면서 그 이면에 있는 의미를 한번 짚어봤습니다.
혹시 변희재씨에 대한 제 개인적인 편견이나 혹은 글의 팁게 여부가 불편하신 분들은,
글내에 있는 공인이론과 명예훼손소송간의 이해를 돕는 시사상식 팁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소 긴 글이라 원문으로 보시면 편하실 것입니다. 블로그 홍보처럼 보여 죄송합니다. (원문 http://goo.gl/EfQacp)

변희재, 생계형 소송시대를 열다.

과거

“아나운서 될려면 다 줘야 한다”

로 막말계를 제패한 강용석이지만 사실 이 말의 임자는 따로 있습니다.

그보다 훨씬 전인 2004년에,

“연예인 취재 할려면 다 줘야 한다”

는 취지의 글로 장안의 뭇 여심을 홀라당 뒤벼 놓은 상남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The.변희재 입니다. 당시 브레이크 뉴스의 기자로 일하던 그는 해당 지면에 ‘여기자들이 연예인 취재를 위해 매니저 등에게 몸을 팔고 여자 방송작가들도 그런 경우가 많다’는 기사를 올려 순식간에 뭍 여성들의 공적公敵으로 등극합니다. 물밀듯이 답지하는 비난과 질책에 그가 내놓은 해명은,

”방송작가들도 그런 경우가 많지만 (사회적 지위가 낮아서) 놀라지 않는데 여기자들은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직업상) 엄청난 모독을 느낀것 같다”

는 호탕한 발언이었습니다. 구체적인 팩트가 뭐냐는 추궁의 답으로 그는 아는 기자의, 아는 기자가 한 말을 전해 들었다고 호기롭게 이야기합니다. 여하간 강용석의 아나운서 발언과는 스케일 자체가 달랐던 이 전대미문의 막말사건은 ‘여기자협회 전체 회원들과 패션지와 여성지 기자 분들에게 사과한다’는 변희재의 사과문으로 소송직전에 겨우 불이 꺼집니다.

지금이야, 애국’동지들과 함께 자유육식연맹을 상대로 일대성전이나 벌이며 소일하는 열혈청춘이지만 변희재도 한 때 ‘불타는 좌빨’이었습니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의 열혈한 지지자이자 안티조선의 필진이었으며, 친노성향 사이트인 서프라이즈의 고정 필진으로 임시 운영자이기도 했었습니다. 입만 열면 외치는 친노종북매체의 대표주자인 한겨레에서 그가 논설위원으로까지 활동했었다는 것까지 복기해보면 사람 일은 참말 모르는 것입니다. 10년이면 강산은 변하기만 하지만, 사람은 다시 태어날 정도가 되나 봅니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 참고만 합시다. 사람은 변할 수 없지만 의견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생계형 소송의 창시자

광우병 파동 때 배우 김민선과 정지영더러 ‘지적 수준 수준도 안되는 자들’이란 망언을 내뱉었다가 같은 서울대 동문인 방시혁 등에게 뭇매를 맞고 찌그러진 일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조폭의 자살에 비유했다 사모하던 조선일보에게 조차 ‘사람의 태도와는 거리가 먼 일’이라는 집중포화를 당하는 등, 네임드가 되기 위해 변희재가 걸어야 했던 길은 험난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런 ‘듣보’ 변희재를 네임드의 반열에 올려놓은 일은 어그로가 아닌 소송 한 방 이었습니다. 이른바 진중권과의 ‘듣보잡’ 소송입니다. 자기를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라 부른 진중권을 명예훼손과 모욕죄로 고소하여 2010년 최종 승소 판결을 받은 것이죠.

판결의 법적인 의미는 ‘타인을 듣보잡으로 부르면 앙돼!’였지만 파생된 효과는 ‘희재는 듣보잡이 아니다’였습니다. ‘듣보 변희재’에서 ‘not 듣보잡’ 변희재로 환골탈태되는 순간이었죠.

이 재판 과정을 통해 변희재는 소송을 이용한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에 눈을 뜬 듯 합니다. 백날 어그로질을 해봐야 남는 것은 찌질함 뿐이지만, 소송을 통해 이슈를 만들고, 이슈를 가까운 매체들을 통해 재생산하면, 사회적 발언권을 높이는 동시에 매체의 인지도와 클릭 수까지 늘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입니다. 게다가 고소라는 형사소송과정은 지사志士라는 이미지까지 입혀줍니다. 종북좌빨에게 서슬퍼런 창을 정조준한 보수의 잔다르크란 착시효과였죠. 금상첨화로 형사소송은 비용도 들지 않습니다. 당사자 혹은 관계인으로 고소, 고발만 하면 나머지는 형사재판과정을 통해 세금으로 진행되니 자신이 손해를 볼 일은 없습니다. 손 안되고 코푸는 격이었습니다.

하지만 변희재는 이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한국 소송사에서 한 문단을 차지할‘소송예고’라는 편법을 생각한 것이죠.

혹시 변희재와 썸을 타 화제가 됐던 소송들을 기억하십니까.

– SNL에서 자기를 이상한 놈이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최일구와 안영미 고소 드립 2013. 05
– 오늘의 유머, MLB 파크 고소 드립 2013. 06.
– 낸시랭 BBC 초청 조작건으로 고소 드립 2013. 08
– 낭만창고, 자유육식연맹 고소 드립 2014. 01

위 여러 고소드립의 공통점은 현재 고소진행 중인 사건이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SNL 사건은 최일구와 안영미는 애초에 제껴둔채 CJ를 향한 민사소송만 제기했고, 오유. MLB 파크, 낸시랭, 자유육식연맹은 고소장 접수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올 1월 고소장을 접수했던 낭만창고와도 지난달 창고측과 화해를 했습니다.

변희재의 고소 마케팅에는 못된 ‘공모共謀’가 있습니다. 변희재가 고소를 하겠다고 예언하면, 여타관련 유사 인터넷 매체들이 일괄적으로 ‘변희재 000 고소’로 기사 타이틀을 뽑아 내용을 확대 재생산 시켰습니다. 실질적인 고소장 접수와는 상관없이, 변희재의

나, 누구누구 고소할꺼야

란 일성만 터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클릭 장사에 동참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다시 변희재는 사회적 정의?를 위해 비분강개히 소송의 칼을 빼든 열혈지사가 되고, 소송의 상대방은 변희재에게 소송당할 짓을 한 가해자가 되어 온갖 유.무형적 피해를 입게됩니다. 오히려 실질적인 소송과정의 진행이 없으니 부담도 적을 뿐더로 실제로 ‘고소예고’를 통해 충분히 지면을 달궜으니 변희재로서는 고소보다 더 낫고, 매체는 매체대로 이득을 보는 서로 윈윈하는 구도였던 것입니다.

듣보잡 소송으로 변희재가 승소한 2010년부터 최근까지 사회는 변희재의 이 소송놀음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변희재가 행한 짓은 명백합니다. 사회적 정의를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민.형사법 절차를 악용하여 철저히 개인의 영달과 영리추구의 목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첨예한 이념갈등상황을 등에 업고 유사 인터넷 언론매체와 손잡아 생계형 소송시대를 연 것입니다.

허지웅

저는 허지웅에게 2가지 고마움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서슬 퍼렇던 나꼼수 광풍 때 시사인 지면을 통해 ‘내가 김어준을 비판하는 이유’란 글로 나꼼수 광풍의 위험성을 경고했던 것과 다른 하나는 최근 썰전을 통해 ‘셀레브리티’란 단어를 안착시킨 것입니다.

셀레브리티(celebrity), 명사라는 개념은 미연방법원의 공인이론(Public Figure theory)를 통해 확립된 개념입니다. 거칠게 정리해보면 공인이론은 공적인 인물들을 비판할 경우, 일반인보다 폭넓은 표현의 자유를 인정받는 것 입니다. 쉽게말해 일반인들에게 하면 모욕이나 명예훼손으로 적용될만한 표현이더라도, 공적인 인물들에게 했을 때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 분류로 정치인,공무원 등의 공적公的인 공인公人(Public official), 전면적 공인(pervasive Public figure), 제한적 공인(limited Public figure) 등으로 나눠집니다.

문제는 이 Public figure가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직역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인물’이란 뜻의 Public figure를 공인公人으로 직역하면서 공무원에 가까운 공적인 인물, Public official란 개념으로 혼용하며 써 버린 것이죠.

연예인은 ‘공인’(pervasive Public figure)이니까 까도 돼.

나아가

연예인은 공인이니까 공적인 인물Public official에 맞게 행동거지를 가져야 해.

란 이상한 명제가 성립해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연예인등을 의미하는 전면적 공인이란 pervasive Public figure는 우리말로 ‘유명인’으로 번역되는게 더 합당합니다. 유명인에게 공적인 인물(공무원, 정치가)에 준하는 윤리규정을 요구하는게 합당할까요. 연령, 교육의 정도, 사회적 경험 등 전혀 다른 지표를 가진 두 부류에게 뭉뚱그려 공인(Public figure)으로 묶어 잣대를 들이대니, 지금도 계속되는 마녀사냥이 자행됐었던 것입니다.

이런 카오스를 허지웅이 썰전에 나와 셀레브리티 한 방으로 정리해 버린 것입니다. 그 후로 점차 여러 인터넷 매체에서 명사라는 분류를 쓰는 것이 자주 보이는 것을 보니 이 개념도 조만간 안착이 될 듯 합니다.

표현의 자유

변희재의 고소드립, 비방드립, 소송드립 등을 보면 이 공인이론을 절묘하게 이용해 먹는게 눈에 띕니다. 소위 정치가들의 공적인 인물에게는 전면적 공인론을 들어 비방의 합법성을 주장하고, 김민선, 공지영, 낸시랭, 김미화 등에게는 유명인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들어 온갖 독설의 정당성을 찾습니다.

결국 변희재가 들고 있던 칼은 단 하나 ‘표현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변희재의 칼은 표리부동합니다. 타인을 향한 비방의 자유는 관대하지만, 자신을 향한 표현의 자유에는 표독스럽게 달려들기 때문입니다. 현재 변희재와 관련있는 대개의 소송들은 딱 2가지로 분류됩니다. 남의 표현에 대한 소송과 자신의 표현에 관한 소송.

전자는 아시다시피 변희재가 자신을 두고 한 표현들에 대해 그간 걸어온 소송과 소송예고들입니다. 그리고 후자는 앞으로 서서히 더 변희재의 목줄을 죌 자승자박이죠.

고스톱-설사

아니. 공인들에게는 폭넓은 표현의 자유가 인정되서 어지간한 발언으로는 처벌받지 않는다면서 왜 갑자기 변희재가 실형을 받는거냐?!

하고 되물으실 수 있습니다.

이유는 미국법원과 다르게 공인이론을 적용하는 국내법원의 태도에 있습니다. 미국이 공공성을 우선 판단하여 공인들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한다면, 우리 법원은 공익성보다 진실성을 우선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똑같이 허위의 사실이 포함된 표현이라도 미국에서는 공공성을 이유로 면책 받을 발언이, 우리나라에서는 진실성을 이유로 처벌받게 되는 것입니다. 변희재가 툭하면 들고나와 흔들었던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이 바로 그것입니다. 결국 변희재는 미국식 표현의 자유(언론의 자유)를 들고 설레발을 치다 한국식 표현의 자유에 되치기 당한 것입니다.

한 진영의 확고한 지지기반으로 먹고 사는 정치인과 달리 연예인은 진영을 가지기 힘듭니다. 한 진영을 적으로 돌리는 순간, 좁은 땅덩이에서 사는 절반 이상의 사람들에게 외면 당한다는 뜻이니 이는 곧 비자발적 은퇴를 뜻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김미화씨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변희재를 상대로 한 형사소송이 김미화씨 본인에게는 쉽지않은 형극의 길이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변희재를 상대로 한 김미화씨의 승소판결은 뜻 깊으면서 서글픕니다. 변희재의 소송폭력배짓이 왜 4년넘게 자행되어야 했으며, 왜 그것을 연예인이 막아야 하는지 말입니다.

앞서 손해배상소송에서 승소판결을 받은 통진당의 이정희 대표나 김미화씨가 형사소송보다 먼저 민사소송을 택한 것에는 나름의 속내가 있을 텝니다. 현재 검찰이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형사소송하에서는 변희재를 실질적으로 의율할 수 없다는 처연한 판단이었을 겁니다. 먼저 민사소송에서 승소판결을 받고 그것을 근거로 형사소송에서 압박하자는 것이 전략이었을 겁니다. 그러다 소 뒷 걸음치다 쥐 잡은 격으로 김광진 의원이 실형판결을 받아버린 것이죠.

이번 실형 판결도 가만보면 이례적입니다. 애초 검찰이 구형한 것은 벌금 300만원의 약식기소였습니다. 약식기소는 별도의 공판절차없이 법원의 약식명령으로 끝이 나는 재판입니다. 검찰이 ‘얘 300만원만 때려주세요.’ 그러면 법원이, ‘희재는 사이邪意하니 개값을 물도록 하여라. 끗.’ 하고 끝나버리는 거죠. 배당된 곳도 1심 단독재판부였습니다. 3명의 판사가 참여하는 합의부 재판과 달리 단독재판부는 판사 한명이 사건을 결정합니다. 따라서 단독재판부에 배정되는 사건은 대개 벌금형이나 1년형 미만의 경미한 처벌로 끝이 납니다. 결국 수순대로라면 법원이 때린 300만원을 변희재가 내고 끝나는 순이었을 겁니다. 이걸 법원에서 정식재판으로 넘겨 버린 것이죠. 그냥 개값 물고 끝낼 사안이 아니라 자세히 들여다봐 잘잘못을 따져 제동을 걸겠다는 재판부의 판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변희재 구속영장 발부사건은 그 과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정리하면 검찰이 잡아다가 대충 껌값받고 풀어주세요라고 한 사안을 법원이 기어코 사건 파일을 열어 실형을 먹인 케이스인 것이죠.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피해자를 비방한…사안이 절대 가볍지 않다”는 판결은 변희재의 ‘생계형 비방’이 더 이상 묵과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법원의 판단을 뜻합니다.

당연히 따르는 의문은 같은 사안을 왜 검찰은 ‘가볍게’ 판단했냐는 것입니다.

변희재가 타고 있는 생계형 소송은 2가지 면에서 양날의 작두입니다. 첫째는 소송의 내용측면에서 변희재가 상대에게 제기하는 모욕, 명예훼손 등의 근거가 그대로 돌아와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소송의 형식 측면에서 무고죄라는 반소反訴의 위험을 항상 안고 가야 한다는 점이다. 변희재 자신이 자신을 고소한 이정희나, 고소 의사를 밝힌 세월호 유가족 등을 무고죄로 고소하겠다고 을러댄 것처럼 변희재 자신도 이 무고죄의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일례로 최근 무상급식 직전에서 기사회생한 강용석의 사례가 있지 않습니까.

사실. 지금까지 이렇게 변희재가 기세등등 활개를 친 이유는 이를 묵인하고 방조한 검찰에 있습니다. 변희재의 이 생계형 소송을 고운 눈으로 바라보는 법조인들이 없을진대 단지 현정권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그저 방관한 것이죠. 이번 김광진 의원 사건도 아무리 국회의원의 명예훼손 사건이 관례적으로 벌금형에 그친다하더라도 그간 변희재의 생계형 송사이력을 보건대 충분히 실형이상의 구형을 통해 법원의 판단을 받아볼 여지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꼬장을 부려도 오냐오냐 해 주는 든든한 뒷배가 있어 변희재의 생계형 소송이 오늘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것

김미화도 승소하고, 변희재는 실형을 받았으니 이제 지구의 평화는 지켜지게 될까요.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판결직후부터 항소의지를 밝힌 변희재에게 2심에서도 실형을 선고할지는 미심쩍습니다. 당장 ‘애국’ 매체에서 들고 있는 국민의 법감정 운운 등을 봐도 그렇습니다. 다시 벌금형으로 감형될지 어떨지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변희재의 생계형 소송에 잠시라도 가해진 금제에 만족하며 뒤따를 소송들을 관망해야 겠습니다.

하나 더. 혹시 변희재의 실형판결을 듣고 환호하실 분들이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애초에 변희재가 벌린 이 생계형 소송은 승패와 관계없이 변희재 ‘등’ 의 독식 구조입니다. 이 소송의 승패로 인해 시민이 이득을 보는 일은 없습니다. 바로 (모욕 혹은)명예훼손 소송의 반대편에 자리잡은 표현의 자유입니다.

변희재가 실형을 받은 판결의 중의적 의미는 ‘국회의원 등을 비방하면 실형으로 처벌을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여기에 공공의 이익이나,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란 단서가 붙지만 결론은 공무원 또는 정치인(Public official)을 향한 정도를 넘은 비방은 처벌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공인 혹은 정부기관들에 비해 정보 접근권이 현저히 떨어지는 일반인이 불완전한 정보에 기해서 정치인 등을 비판하면 비방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최근 남발되고 있는 국가기관이나 공직자에 의한 명예훼손 소송, 혹은 단적으로 국정원이 표창원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건을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언론에 대한 재갈입니다.’청해진 직원이 세월호 사고 징후 청와대 신문고에 고발했었다’는 한겨레 기사에 대해, 청와대가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청와대 신문고’는 없고, ‘국민 신문고’만 있으니 해당기자를 허위사실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는 얘들 말장난 같은 겁박입니다.

애초에 공인이론은 국가기관과 언론사간의 싸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60년. 미국 앨라매마주 경찰 국장이던 설리번이 뉴욕타임즈에 게재된 ‘일부’허위사실 광고에 대해 제기한 명예훼손소송으로 시작된게 오랜 논의를 거쳐 지금에 다다른 것입니다.

1960년 3월 29일, 뉴욕타임즈에 전면 광고가 실렸다.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라(Heed their Rising Voices)”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이 의견광고는, 당시 남부에서 당연시되던 흑인에 대한 비인간적인 차별과 탄압에 대해 비판하고 그 철폐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4월 5일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시의 한 지역신문이 이 광고에 관한 기사를 내게 된다. 문제는 이 광고 중 몽고메리시 경찰이, 대표적인 민권운동가였던 마틴 루터 킹과 그 지지자들에 대해 테러와 협박을 시도했다는 내용이 있었다는 것. 다음날 이를 읽은 몽고메리시 경찰국장인 레스터 설리번(L. B. Sullivan)은, 기사 중의 경찰이 자신을 지칭하며, 몇몇 내용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뉴욕타임즈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벌인다.

처음 앨라배마 주법원은 (현재 우리법원의 입장처럼)뉴욕타임즈의 몇몇 광고내용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뉴욕타임즈더러 설리번에게 50만불을 지급하도록 판결을 내렸었습니다. 그러자 뉴욕타임즈가 항소하여 미국연방대법원에서 공인(Public Figure)인 경찰국장은 일반인보다 명예권이 제한된다는 이유로 뉴욕타임즈의 손을 들어준 것이죠. 그리고 추후 뒤이은 판결들에 의해서 현재의 공인의 의미와 분류가 파생된 것입니다.

결국 명예훼손 소송의 뒤에는 일반 시민의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 외에, 궁극적으로 국가기관에 대한 언론의 견제와 감시, 그리고 그 전제가 되는 언론의 자유가 놓여있습니다. 민주주의 핵심요소에 대해 많은 정의들이 따를 수 있겠지만, 현행 대의제 간접 민주주의 하에서는 언론의 자유는 시민이 ‘상시’ 정부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언론의 자유를 통해 형성된 여론이 대의제 행정부와 입법부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한시적인 왕정이나 귀족정에 다름없습니다.

결국 성숙된 사회적 합의 대신, 변희재가 들고나와 분탕질 친 이 생계형 소송은, 어떤 결론으로 끝을 맺건 당분간 한국 사회에 타격을 입히게 됐습니다. 명예훼손 소송이 폭넓게 인정될 수록 언론(표현)의 자유는 줄어들 수 밖에 없고, 언론의 자유가 폭넓게 인정될 수록 국가기관과 공인의 명예권이 침해받는 둘은 필연적으로 반비례 관계입니다. 변희재가 패소하면 표현과 언론자유가 위축될 것이고, 변희재가 승소하면 무책임하고 공공연한 비방이 일상화되는 난장판 사회로 접어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희재에게 떨어진 실형을 보며 착잡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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