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효과

영어로 Matthew effect, Matthew principle, Matthew rule 이런 식으로 검색을 하면 마태복음의 저자인 사도 마태와는 전혀 다른 경제학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25장29절 내지 누가복음 8장18절, 마가복음 4장25절 말씀들에서 예수님이 직접 언급하시는 구절이자 빈익빈 부익부의 법칙을 암시하는 듯한 구절들을 인용해서 한 경제학자자가 빈익빈 부익부 법칙을 설명한 게 이른바  마태 효과입니다.

저도 개신교 신자이고, 교회를 출석하고 있지만, 다른 분도 아닌 예수님이 빈익빈 부익부 법칙을 언급한다는 게 생경스러워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빈익빈 부익부의 법칙은 엄연히 이 세상이 돌아가는 현실법칙의 중요한 근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돈이나 재산 그 자체가 아니라 “적응력”입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는 기본원칙에 순응하고 적응해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점점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고, 그 결과로 더욱 더 부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원칙은 심지어 공산주의국가나 사회주의국가에서마저 통용되는 원칙입니다. 생산수단의 공유-평등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 마저도 격차는 존재하고, “사적 소유”가 금지되있는 공산국가 안에서마저도 생산수단을 누가 “관리”하고 “점유”하느냐에 따라 빈익빈 부익부는 거스릴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이 됩니다.

마차가지로,  관련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성경 말씀을 들여다 보면, 신앙 뿐 아니라 현실세계에서도 적용되는 이런 부익부 빈익빈의 법칙을 긍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러한 법칙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있는자가 더 받고 없는 자는 있는것까지 빼앗긴다는 말을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렇게 빼앗긴 자는 어두운대로 내쫓겨 슬피 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를 일으키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이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유명한 두가지 비유입니다. 신랑을 맞으러 간 열 처녀의 비유와 다섯 달란트로 장사한 종은 칭찬 받고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던 종은 꾸지람을 받은 비유 말입니다.

이 두가지 비유에서 패배자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실상 그들 패배자들은 결코 악하거나 어리석었던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로 불리우는 처자들이 과연 정말로 “미련”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신랑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렇게 늦은 밤이 되어서도 나타나지 않는 예상외의 사태를 대비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혼인잔치를 참석해야 하는 신랑의 입장에서 혼인잔치가 다 끝나가는 깊은 밤 새벽녁이 되어서까지 나타나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당연히 초저녁이나 늦어도 밤이 깊기 전에는 혼인잔치에 참석을 해야 되니 당연히 상식적인 판단으로 기름을 따로 병에 담아놓고 갈 필요는 없다고 보는게 상식적인 판단입니다.

즉, 신랑이 그렇게 늦게 나타나는 일은 통상적인 상황이 전혀 아닌 매우 드물고 상식적으로 상정하기 힘든 사태였다는 겁니다.

오히려, 기름병에 기름을 넣어놓고 대비한 나머지 다섯 처녀의 행위가 “통상적인 범주”에서 본다면 더 어리석었다고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쓸데 없이 기름병을 들고 가느라 무거웠을테고, 그로 인해 비싼 기름값을 더 지출해야 했으므로 옷단장이나 예물을 준비하는 데 더 소홀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신랑이 제 시간을 지켜서 왔었다면, 오히려 기름병을 따로 준비한 처녀들에게 불리한 요소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름을 더 준비했던 다섯 처녀가 현명했던 건 “기댓값”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처녀들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입니다. 아무리 다른 준비들을 적절히 했다 하더라도,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면 그것만큼 치명적인 손실은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발생할 확률이 낮은 이벤트라 하더라도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발생할 확률*발생시 가능한 손실액”, 즉 기댓값을 넘지 않는다면 기용을 감수하는게 안전한 길입니다. 현명하고 스마트함 보다는 “안전함”을 선택한 것이지요.

상당량의 돈을 기름과 기름병을 따로 사는데 써서, 그걸로 충분하게 치장을 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신랑에게 면박을 당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면박과 창피를 당하고 조롱받을 확률이 99%가 된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걸로 인해 신랑과 혼인잔치를 가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기댓값에서 분명 우월한 선택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다섯 달란트를 남긴 것을 주인이 칭찬한 비유도 여러가지로 고민할 점들이 분명 많습니다. 알다시피 장사라는 건 밑천이 많으면 많을수록 수익을 남기기가 더 쉽습니다. 애초에 주인이 그 종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긴 이유도 그 종에게 다섯달란트를 가지고 수익을 남길만큼 큰 장사수완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에 반해 두 달란트 가진 종이 열심히 장사를 해서 두 달란트를 남긴 건, 어쩌면 다섯 달란트 수익을 낸 종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비슷한 수익을 낸 건지도 모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러한 충성과 근면을 주인은 높게 평가해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라고 선언합니다. 즉, 주어진 기회를 버리지 않고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다음 번에 더 큰 수익을 낼  기회를 얻었던 겁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돈을 땅에 묻어놓은 것도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두려웠던 겁니다. 자기 자신이 다섯 달란트 받아서 장사수완을 발휘하고 있던 유능한 종만큼의 능력이 안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 자신의 부족한 능력으로 장사를 하다 망치면 하나 있는 달란트도 날릴 게 분명합니다. 게다가, 다섯달란트 받은 종보다도 더 지극히 높은 데 있는 그의 주인을 보면 감히 장사를 할 엄두가 나지 않을수도 있었을 겁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주인은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심지 않은 데서 돈이 거두어지는 마법은 고리대금업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로 했었겠죠. 이런 걸 눈에 보고 나서 감히 돈을 불려볼 생각을 하기 어려운 건 어리석은 것도, 악한 것도 아닐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이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은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매도하고 돈을 빼앗습니다. 왜냐하면, 그 돈으로 고리대금을 했더라면 틀림없이 몇 데나리온의 수익이라도 건질수 있었음에도 그조차 하지 않음으로서 주인에게 손해를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주식으로 치면 안전자산 수익율마저도 포기한 행위입니다. 여기에 더해 이 종은 그렇게 장사를 하는게 겁이 났다면 그 돈을 땅에 묻은 후 열심히 노동을 해서 근로수익을 가지고 주인에게 줄 수도 있었을텐데, 그마저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주인의 입장에서는 수익은 커녕 고정적으로 손실만 내고 있으면서 앞으로도 상황이 개선될 수 없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니 도태시키는 수 밖에 없는겁니다.

이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이 마태효과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드는 비유는 훨씬 더 실랄합니다.  이른바 씨 뿌리는 비유로, 씨앗들은 자신이 길 가에 뿌려질 지, 바위 위에 뿌려질지, 가시떨기 속에 뿌려질 지, 아니면 좋은 땅에 떨어질 지 전혀 선택할 수도 없고, 상황을 통제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주어진 환경을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을 고스라니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척박한 환경 아래에서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환경을 바꾸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건 너무 억울할 수 밖에 없지요.

물론, 성경 말씀에서 이 비유는 사람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마음이 다르고, 제대로 받아들여서 열매 맺는 사람은 극소수라는 걸 말하고 있습니다만, 세상 돌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람의 능력이나 처한 환경에 따라서 결과치가 극한의 초격차를 낼 수 밖에 없다는 건 엄연한 현실입니다. 내가 선택해서 길 가의 뿌리내릴 수 없는 땅이 된 게 아니고, 내가 노력해서 백배의 결실을 내는 좋은 땅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예수님의 실랄한 비유도 꼼꼼히 읽어보면 오히려 우리에게 힘과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비유를 풀어주시면서 이 “땅”이라는 비유가 다름아닌 사람의 “태도”라고 설명하시기 때문이죠. 좋은 책, 성공한 사람이 성심성의껏 알려주는 성공 비결, 자신에게 적합한 가르침등을 들어도 자신의 본능과 지금까지 자신을 가로막고 발전을 저해하던 나쁜 습관들에 의해 그런 좋은 정보들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길 가에 뿌려지는 씨앗이고, 진심으로 가르침을 받고 열심히 공부하지만, 그걸 자신의 행동의 변화로까지는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앗이라는 겁니다.

그러한 태도와 마음은 때에 따라서는 어떤 계기로 인해 달라질 수 있는 거거든요. 자신의 육체와 환경이 규정하고 있는 한계 이상을 자신의 마음과 태도를 변화시킴으로서 돌파할 수가 있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그게 신앙의 영역에서건 현실사회에서 돌아가는 세상 법칙이건 다 적용되는 원칙이라는 게 우리에게 얼마나 힘이되고 좋은 말씀인가요?

결론적으로 “마태효과”라고 일컫는 빈익빈부익부라는 자연법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근원이 되는 성경구절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연계나 경제시스템이나 주식시장 어디를 봐도 최대효율을 위해 가장 먼저 배제하는 악덕이 “안이함”과 “게으름”이며, 가장 중요하게 선택하는 미덕이 “기댓값에 대한 고려”와 “듣고 받아들이며 행동변화로 이끌어내는 태도”라는 점을 되새겨 볼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이라는 건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해석을 받아들여야 하는 법조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다 자기만의 해석과 적용을 할 수 있는 열린 이야기입니다. 때문에 단순히 빈익빈 부익부 법칙이라도 여러 상황에서 다양한 해석과 적용이 가능할 겁니다. 중요한 건 이렇게 단순해 보이는 현상이나 법칙이라도 다양한 관점으로 깊게 고민해서 내가 적용할 수 있는 무언가로 도출해내는 습관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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