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선 짬날 때 읽었던 책을 정리하고, 집에서는 새로 사놓고 안읽은 책을 읽고 있는데, 게임 좋아하는 아들 앞에서 책읽는 모습을 최대한 많이 보여주면 조금이나마 영향을 미칠까 하는얄팍한 속셈 때문입니다.
지금은 레이 달리오의 원칙을 읽고 있는데, 비싼 양장본이 전혀 아깝지 않은 투자자로서의 살아있는 경험담과 교훈이 처음부터 쏟아져나오더군요. 정말 잘 산 책이고, 이걸 이제야 읽는 것(책값이 너무 비싼데다 출판계에서 너무 홍보를 많이 하는 책들 중에 알맹이 없는 것들이 종종 있었거든요)이 후회되는 책입니다.
레이 달리오는 선물투자와 컨설팅을 업으로 삼고 있는데, 1970년대에 인플레이션 시기에 원자재 가격이 크게 오를 것으로 예상해서 당시 최고의 부자중 하나인 벙커 헌트(Bunker Hunt)와 함께 은 사재기를 시작했습니다. 벙커 헌트가 은을 매입하기 시작하던 당시의 시세는 1온스당 1.29달러,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서 은 시세가 올라가기 시작했지만, 그는 계속 은을 매집합니다. 그 결과, 은 시세는 1온스당 10달러까지 올라갔고, 레이 달리오는 여기서 보유한 은을 모두 처분해서 대박을 냈습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은 사재기를 했던 헌트는 은을 처분하지 않고 계속 보유하는 걸 넘어 계속 사모으는 거였습니다. 레이 달리오는 그에게 사모은 은을 이제는 처분하는게 좋겠다고 충고했지만, 헌트는 그의 충고를 무시하고 계속 보유했습니다. 그런데, 레이 달리오의 충고가 무색하게 몇 달 뒤인 79년 12월 경에 은 시세는 온스당 50불을 넘기게 됩니다. 무려 40불이나 되는 수익의 기회를 놓쳤던 거지요. 책에서 그가 고백했던 젊은 시절의 수많은 실수들 중 하나였던 겁니다.
그런데, 은 시세가 50달러 이상이 되어도 헌트는 절대 팔지 않고 버티다가, 80년 3월에 폴 볼커가 초고금리정책을 실시하면서 달러의 평가절상이 시작되 은 시세는 온스당 10달러대까지 떨어집니다. 온스당 50달러 이상의 시세에서도 팔지 않고 계속 사모으기만 했던 터라, 헌트는 채무불이행에 빠지고, 헌트 한사람만의 파산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금융기관들의 연쇄도산까지 갈뻔 했다가 연준이 개입함으로서 겨우 위기를 넘기게 됩니다.
이 사례에서 생각해볼게, 레이 달리오가 온스당 10달러에서 수익실현을 하고 빠져나갔을 때 그의 판단이 옳은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레이 달리오의 판단 자체는 지극히 타당한 것이었고, 결국에는 그의 예상대로 경제가 흘러갔습니다. 그걸 보면 레이 달리오의 판단이 옳은 것이었고, 당시의 거시경제 상황을 고려한 은의 본질적인 시세는 온스당 10달러라고 보고 빠져나가는 게 옳은 선택입니다.
하지만, 시장은 그렇게 합리적으로 돌아가는게 아니라는것이 문제입니다. 적어도 1979년 12월까지의 상황에서 은 시세가 온스당 50불까지 쳐 올라갔던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지만, 어쨋던 현실은 그런 전문가들의 예상을 농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온스당 10불에서 15-20불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자그마치 다섯배까지 올라갔는데도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어야 하는 상황을 견딘다는 건 보통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겁니다.
사실, 레이 달리오에게 가장 치명적인 상황은 이 때의 당혹감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투기판에 뛰어드는 상황이었겠죠. 이 사례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교훈들을 정리해보면 몇개가 나올 수 있을겁니다.
1. 거시경제나 펀더멘틀이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반영되는 데에는 항상 시차가 존재하며, 그 시간 동안에서는 인간의 심리가 시장의 모든걸 지배할 수 있다.
2. 그러한 타이밍에 수익을 누릴 수 있으려면, 뭣보다도 그 전부터 계속 관문을 지키고 있어야지, 뒤늦게 뛰어들면 최악의 파국에 빠질수 있다.
3. 가장 합리적이고 냉철한 판단도 현실에서는 잘못된 결과로 도출될 수 있다. 그 생각이 현실에서 올바르게 적용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게 해주는 건 인내심과 자기성찰이다.
4. 과연 벙커헌트는 레이 달리오보다 더 어리석어서 파산했을까?
1979년 12월 시점까지 그는 레이 달리오보다 훨씬 더 현명했고, 시장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단지, 폴 볼커 연준의장이 그렇게까지 공격적으로 금리를 올릴거라는 예상을 못했을 뿐이다.( 당시는 스테그플레이션 상황으로, 금리를 올리기도, 내리기도 모두 어려운 상황이었음).
그러나, 그렇게 누구나 맞히기 어려웠을법한 그런 틀린 예상 한번으로 그는 모든 걸 잃고 파산했을 뿐 아니라, 그와 거래하던 대형 증권은행들까지 부도위험에 내몰았다. 아무리 적중확률이 높고, 현명한 선견지명에 근거해서 투자를 하더라도, 안전판이 없는 외줄타기는 언제든 이런 결말을 초래할 수 있으니 두겹 세겹의 안전판을 항상 마련해 놓는걸 잊지 말자. 항상 그런건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서 정책을 이기는 투자자는 존재할 수 없다.
레이 달리오의 원칙을 이제 겨우 10분의 1정도 읽고 있는데, 이 사례 말고도 교훈이 될만한 이야기가 정말 많더군요. 책값은 비싸도 이 책은 꼭 사서 여러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투자를 하시는 분이라면, 책 값 이상을 반드시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