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클스는 실수하지 않았다

대공황이 발생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거론되고는 하는게 당시 연준의장인 에클스의 금리인상입니다. 이른바 “에클스의 실수”라고 회자되는 사건이지요. 여기서 생기는 의문,,, 에클스가 정말로 “실수”로 경기가 과열이라고 판단해서 기준금리를 올렸던 걸까요?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99

위의 링크는 당시 국제경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를 요약해서 설명해주는 기사입니다. 기사 내용을 더 짧게 요약하자면

  1. 1931년 9월 영국 파운드화의 금본위제 이탈
  2. 이로 인한 통화위기에 경제상황이 안좋은 패전국들은 외국환 거래를 금지, 금본위 질서에서 차례로 이탈
  3. 금본위제 유지국가는 미국, 프랑스,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5개국만 남음, 미국도 금본위제 포기할거라는 불안감 만연
  4. 1차대전 동안 막대한 금을 미국에 예치해놓았던 프,벨,네,스 4개국은 미국에서 금을 가져오기 시작
  5. 연준은 의회와 행정부의 승인 없이는 금본위제를 포기할 수 없었으므로 차선책인 금리 인상을 단행
  6. 그렇지 않아도 디플레이션 상황에서 금리가 오르니 실질금리는 더 크게 상승, 이로 인한 통화량 감소 자산가격하락 가속

이런 전개 중에서 연준이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까요? 아무리 봐도 1차대전 이후 리더십이 실종한 상태에서 국가간 경제공조가 무너진 상황에서 금본위제를 포기할 수 있는 법적권한이 없는 연준이 할 수 있는 대안은 아무리 돌이켜봐도 없어보이는게 사실입니다.

결국 에클스는 실수를 한게 아니라 외통수에 걸려서 그런 선택을 할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던 겁니다.

이 이야기는 정말 중요한 고훈을 남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국가간 경제공조와 협력이 깨지면 서로가 다 죽어나가는 외통수에 빠져도 헤어나오기가 어렵다는 점,

둘째는 연준도 만능이 아니며 미 행정부와 의회가 결정을 주저할 경우 뻔히 알면서도 최악의 선택을 강요당할수 있다는 점.

세째는 당시는 인플레이션에(바이마르 하이퍼인플레이션) 대한 공포로 디플레이션 상황에서도 겁없이 금리를 올릴 수 있었는데, 이제는 디플레이션에 대한 공포로 겁없이 마이너스 실질금리를 장기간 용인하고 있는 상황,,, 당시와 방향만 다르고 양상은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중,,,

결국 자산가격의 형성에서 중요한 건 인플레이션이냐 디플레이션이냐가 아니라 “실질금리”인것 같습니다. 대공황 전후에 그렇게 디플레이션이 심했어도 실질금리가 올라가니 자산가격이 폭락한 반면, 최근의 저물가 상황에서는 실질금리가 마이너스에 이르르면서 자산가격이 급등하고 있습니다. 미국 역사상 실질금리가 가장 극단적으로 떨어졌던 때는 아마 1947년 2차대전 전후상황일 겁니다. 당시 실질금리는 통화가치 하락과 물가상승으로 인해 -15%를 기록합니다. 이정도로 실질금리가 떨어지자 미국은 개인이 금을 아예 보유하지 못하도록 불법화시키고 강제로 금값은 달러화가치에 연동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금가격은 어마어마하게 올라갔을테죠.

당시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연준이기에 지금 실질금리가 어느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 않도록 조절하고 있는(밑장빼기)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일시적인 것이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국가간 협력체계가 완성되어야 합니다. 현지 미국과 중국 간의 긴장과 불안이 그래서 더 위험해보이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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