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설계는 사람마다 다 사정이 다릅니다. 단정적으로 이건 되고 이건 안된다고 말해서는 절대 안되는 영역이죠. 파이어족, 즉 재정적으로 독립해서 빠르게 은퇴하는 라이프스타일도 사정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가능하고 바람직한 형태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조심해야 하는 건 파이어족이라는 게 성립하기 위한 전제조건들이 생각보다 많이 불안정하기 때문입니다.
재정적으로 완전하게 독립하는건 고사하고 부분적으로라도 안정적인 노후를 맞이할 수 있으려면 당연히 일정 수준 이상의 “자산”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자산의 수익성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그것과 10-40년 뒤에 우리가 맞이하게 될 세상의 그것이 같을거냐는데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물가상승률과 금리라는 요소죠.
1980년 이후 전세계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몰아쳤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의 인식이 좋던 나쁘던 간에 전세계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하는 세계화를 만들어냈고, 과거 공산권 국가들과 제3세계 국가들의 풍부한 노동력을 활용해 끊임없는 디플레이션압력을 생산했습니다. 최소한 선진국과 산업화된 중진국에서는 40년에 걸쳐 금리의 장기하락추세를 만들어낸 겁니다. 이런 금리하락은 필연적으로 모든 형태의 자산가격 상승을 초래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그렇게 이뤄졌습니다.
원래 땅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동아시아 국가들을 제외한 구미 선진국에서는 70년대까지만 해도 집을 사면 가격이 오른다는 말은 상식과 동떨어진 말이었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듯이 천정부지로 주택가격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주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하게 지수만 보면 미국 제외 박스권이라 생각할 지 모르나, 시가총액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상승이 맞죠. 채권이야 금리하락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대세상승이라는 것과 동의어니 말 다했고, 암호화폐는 또 어떻습니까?
바야흐로 달러를 비롯한 각국의 화폐가치가 꾸준히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금리가 40년 넘게 계속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의 시대를 살고 있는겁니다. 이렇게 자산가격이 안정적으로 상승하는 흐름이 전제되어야 성립할 수 있는게 파이어족이라는 라이프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 디플레이션 시대”가 과연 앞으로 내가 늙어 죽을때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현재 주요 선진국이나 우리나라의 금리는 여기서 더 떨어질 수 있는 공간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1%대도 아니고 0.75% 금리에서 내려가면 얼마나 더 내려갈 수 있냐는거지요. 물가상승률이 기준금리보다도 더 낮은 0.5%에 불과한 디플레이션 상황이기 때문에 지금은 0.75%이지만 물가상승률이 오르거나, 부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리기 시작한다면 자산가격이 지금까지처럼 안정적으로 오르는건 근본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는겁니다.
그래서 100% 확실하게 자산가격 폭락이 온다는 말을 하려는게 아닙니다. 앞으로는 모든 자산이 어깨동무하고 다함께 오르지 않고 특정한 형태의 자산이나 그 안에서도 특정 지역, 특정 섹터 자산만 오르고 나머지는 무너지는 경향이 심해질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어떤 자산이 오를지 잘 찍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지금 당장 오지는 않겠지만, 5년 내에 올 확률, 10년 20년 내에 올 확률은 점점 더 높아질 수밖에 없겠죠. 그 때가 되면 모아놓은 자산만으로 노후를 의지하거나 지금같은 자산가치 상승기조의 분위기에서 계산해놓은 플랜을 그대로 고수해서는 생존이 불가능하게 될수도 있는겁니다.
하고 싶은 말은 앞으로 의학기술이 좋아져서 내가 몇살까지 건강하게 살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30년, 40년 뒤의 미래를 지나치게 확정적으로 설정해놓고 계획하지 말자는 거지요. 타이슨이 그랬잖아요. 누구나 나를 이길 계획을 세운다고,,, 얼굴에 내 펀치 한대 얻어맞기 전까지만 그런다구요. 노후는 너무 구체적으로 계획하면 안됩니다. 변수가 너무 많고, 그 변수 하나하나가 다들 강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산은 많이 모으면 모을수록 좋은 거고, 일은 오래 일할수록 좋은거고, 절약은 언제나 필수입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돈을 벌고 자산을 증식시키기 위해 내 몸과 정신이 최대한 오랫동안 건강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통제할수도, 계획은 더더욱 할수 없는 영역이지요. 내가 30대나 40대에 재정적으로 독립해서 90세가 될때까지 50년 넘는 시간동안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겠다는 건 누구나 꿈꿔볼 수 있는 멋진 경지긴 하지만, 그 사이에 재정적 독립을 이뤄주던 자산이 망가지게 되면 그걸 다시 회복할 스킬을 습득하는게 정말 여의치 않게 됩니다.
투자나 돈 버는 것에서 손을 놔버린지 3년만 되어도 예전의 감각을 되살리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하물며 60세나 70세가 되버린 다음에는 망가진 자산을 되돌리는게 더더욱 어렵겠죠. 내가 오랫동안 즐겁고 여유롭게 사는 건 고사하고, 꿋꿋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쉽사리 일이나 공부에서 손을 놓으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물론, 철학적으로 너무 비관적으로만 볼게 아니다는 지적이나 그렇게 죽어라 일만 하면서 인생을 즐기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철학적인 논쟁을 하실수도 있을거에요. 하지만, 저는 지금 제 가족과의 관계나 가정생활이 감사하고 이를 어떻게든 나이들어서도 지켜나가고 싶기 때문에 그런 고생과 절약, 공부같은 노력을 나이 들어서도 할 각오를 하는겁니다.
뭣보다 나의 노후를 “자산”이라는 생산수단 하나에 너무 크게 의지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안정하고 리스크가 큰 전략입니다. 굳이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라도 그 자산이 망가졌을 때 내게 선택할 수 있는 플랜B를 젊었을 때부터 생각하고 대비해놔야 안정적인 노후를 설계하는 것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라도 충분한 자산이 있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인 반드시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인생 후반기에 선택할 제2의 직업을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도 자산에 크게 의지하지 않아도 충분히 직업만으로 생활할 수 있는 정기적인 수입이 나이가 들수록 더 필요해진다고 생각해요.
돈은 생명과 건강을 살 수는 없지만, 자유와 시간을 살 수는 있습니다. 이론의 여지 없이 다다익선이지만 건강과 제반여건이 허용되는 한에서 벌수밖에 없는 것일 뿐, 이정도면 더이상은 의미없다는 식의 “재정적 독립”이라는 개념은 너무 모호하고 불완전한 개념이라고 생각하는겁니다. 그렇게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더 절실하게 직업을 찾아야 하는게 대세가 되는 그런 시대가 도래할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태여 이런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당장 물가상승률이 꾸준히 3%정도만 찍어줘도 파이어족 같은 용어는 쏙 들어가서 아무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될거라 봅니다. 그동안 우리가 알게모르게 디플레이션에 너무 찌들어 살고 있었던건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