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흑사병 이후의 물가

중세의 흑사병은 잘 막아낸 경우가 전체 인구의 15%, 참담한 경우엔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죽어나가던 말 그대로 대역병이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흑사병의 비극과는 별개로, 그 이후에 물가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자료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데, 저널리스트 하노 벡이 쓴 “인플레이션” 책에 해당 이야기가 나옵니다.

처음에는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자 곧바로 물가가 하락하고 경기침체가 옵니다. 생산해놓았던 물건은 그대로인데, 그걸 사줄 사람이 줄어들어버렸으니 물가가 떨어지고 경기가 침체되는 전형적인 디플레이션이 찾아온 겁니다. 재미있는 건 그 다음입니다. 그런 디플레이션이 잦아들자마자 경제가 정상화되지 않고 곧바로 인플레이션에 빠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면서 인구는 줄었는데 돈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라는겁니다. 이렇게 돈이 남아도는데 일할 사람도 줄어 구인난이 심해지자 임금이 오르고 그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었다는거죠.

이런 설명을 찬찬히 생각해보면 뭔가 앞뒤가 안맞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줄어들어서 구매력이 감소했다, 사람이 줄어들어서 한사람 당 쓸 돈이 늘고 임금이 올라서 유동성이 늘었다,,, 이 두 현상은 시기적으로 중첩되는 시간대가 많을수 밖에 없으므로 하나의 자연스러운 연속성을 가질수 있습니다. 그만큼 서로의 효과가 서로 상쇄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어지럽게 디플레-인플레가 서로 진폭을 키우며 교대로 사람을 괴롭힌다고 말하는건 이상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디플레이션 이후에 정 반대로 극단적인 인플레이션이라는 큰 반동이 나타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극단적으로 반대현상이 나왔을까를 생각해보면, 결국 당시 위정자들의 부적절한 시장간섭 내지 정책실패가 이런 출렁임을 만들어낸거라 봐야겠죠. 처음에 디플레이션과 경기침체가 나타났을 때 위정자들은 그러한 경기침체에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고자 했을겁니다.

하지만, 사람을 만들어내는건 생각대로 되는게 아니기 때문에 위정자들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쉽고 직접적인 방법은 다름아닌 돈을 찍어내는거겠죠. 결국, 그렇게 조금만 있으면 필연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 유동성증가는 생각하지도 않고 허겁지겁 돈을 찍어내고 유동성을 풀어낸 결과 자연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폭을 훨씬 뛰어넘는 인플레이션을 조장하게 된거지요.

이렇게 당장의 어려움을 모면하고자 지나치게 경제시스템을 건드려 훗날 더 통제하기 어려운 반동현상을 빚어내는 위정자들의 어리석음과 조급함, 탐욕을 우리는 21세기를 사는 지금도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미국의 코로나 직후 벌렸던 막대한 유동성파티 이후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이제 곧 터진다는 식의 무식하고 단선적인 사고를 하자는 게 아니라, 코로나 직후의 디플레이션 국면이 이제 막 인플레이션 조짐으로 국면전환을 하기 시작한 지금 미국 연준이 허튼 혓바닥이 아니라 진심과 진정성을 가지고 인플레이션에 대응하려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이제 며칠 후면 다가온다는 말을 하고 싶은겁니다.

연준이 진심으로 인플레이션의 가능성을 경계하고 그걸 억누를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전쟁이 어떠느니 아직 오지도 않은 경기침체가 어떠느니 이런거에 신경쓰지 않고 기준금리를 50bp 초장부터 올려서 싹을 잘라버리려고 할겁니다. 그게 아니라 25bp만 올리는 행보를 보여준다면, 거기에 더해 국채매입을 언제까지 그만둘건지, QT 일정에 달라진 점은 없는지 같은 세부적인 유동성조치를 확인해야 하겠고,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금리인상 자체를 안하는 서프라이즈한 사태가 벌어진다면 그즉시 모든 투자를 그만두고 현금화 하는게 타당할 만큼 작금의 경기침체압력이 가공할만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봐야 하는거겠죠.

이런걸 보면, 투자를 위해서는 경제도 경제이지만 정치를 아는것이 꼭 필요하지 싶습니다.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담당자의 머릿속을 간접적으로나 미루어 짐작해보고 말로만 떠드는지, 진심을 가지고 무언가를 밀어붙히는 모습이 보이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투자판단에서 정말 중요한 소양 중 하나이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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