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경기가 나빠지면 정부는 경기를 살리기 위해 금리를 낮추고 재정지출을 늘리게 됩니다.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두가지 방법론을 사용하는 거지요. 어쨋거나, 경기침체를 해결하기 위해서 금리를 낮추고, 재정적자를 감수하면서 재정지출을 늘리는게 경기침체에 대응하는 통상적인 대응책이라는 건 누구라도 다 아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날고 기는 선진국과 경제대국들의 경제전문가들과 관료들이 한데 모여서 그런 상식과 완전히 배치되는 뚱딴지같은 주장을 한목소리로 외치던 때가 있었습니다. 다름아닌 그리스 채무위기가 불거졌던 2010년 6월에 토론토에서 개최되었던 G20회의에서 공식 채택되었던 성명서 내용이 그렇습니다.
“민간부문 경기회복 추진력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지속적인 재정건전화(적자해소)의 필요성을 언급하기로 했다.”
이는 미 오바마 대통령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들어간 문구였으며, G20 국가들은 향후 3년 동안 재정적자를 절반 이상 줄이는 데 다 같이 전념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많은 국가들에서 재정건전화라는 이슈의 수요는 다른 모든 현안을 압도하고 있었던 겁니다.
심지어 재정적자를 줄이는 걸 넘어 균형재정, 흑자재정이 될 때 까지 긴축을 계속 고집해온 독일을 모범사례로 여길 정도였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각국이 얼마나 부채문제에 광적으로 불안해 했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부채공포에 휩싸이는 분위기를 조장했던 건 한두사람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글렌 벡 같은 극우성향 보수주의 선동가들, 다수당을 차지하며 확장해가던 미국의 공화당과 영국의 보수당 소속 과격파 의원들, 빌 그로스 같은 입담 쎈 유명인사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재정적자를 세계멸망의 원인처럼 떠들어댔습니다.
심지어는 학계에서까지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정부부채의 증가가 경기를 부양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경기침체와 파국을 일으킨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다름아닌 카르멕 라인하트와 케네스 로고프의 공저인 “채무시대의 성장”이라는 연구논문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이 두 학자는 논문을 통해 “GDP대비 정부부채비율이 90%를 넘어가면 경제성장이 급격하게 둔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문헌에서 GDP대비 정부부채비율이 높으면 성장률이 떨어지고 경기침체가 나온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었던 데이터들이 기초적인 엑셀링 실수에 의한 것으로 검증되면서 이들의 연구가 엉터리이고 결론을 위해 데이터를 짜맞춘 성의없는 주장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2014년 3월에 기고된 이코노미스트 문헌은 근거로 제시된 사료들 속에 2차대전 패전국 상황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경기침체가 정말로 GDP대비 부채비율과 연관성을 입증하기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오히려, 15년이라는 좀 더 장기간의 궤적으로 계산하면 부채비율이 높은 나라들도 경제성장률을 다들 따라잡고 있습니다. 부채비율보다 더 중요한 변수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지적도 나왔는데, 부채가 늘어나고 있는지, 아니면 줄어들고 있는지 같은 추세도 매우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제시한 사료들을 근거삼아 정부부채가 아닌 “민간부채”도 마찬가지로 경제성장률을 낮추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부채의 종류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GDP대비 부채의 액수도 중요한 게 아니라면, 왜 정부가 상식적인 재정정책을 포기하고 증세나 재정지출 억제등을 통해 국민들의 고통을 가중시켜가면서까지 재정건전성에 집착해야 하는걸까요?
결국은 정부부채가 해결이 안되면 나라가 망하고 시스템이 붕괴할 수도 있다는 막연하고 근거가 약한 공포와 불안이 그리스 위기를 통해 전세계에 통하는 하나의 핫한 유행으로 자리잡은 영향으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