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앞에서 그들은 얼마나 막장이었나 – 유로존

(아래는 애덤 투즈가 쓴 “붕괴”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그리스 부채위기는 시간이 흘러도 아무도 해결하려 나서지 않은 채 계속 표류했습니다. 누구도 언급하고 싶지 않았던 채무재조정은 미루고, 그리스가 재정긴축을 하면서 계속 만기연장으로 버티다보면 언젠가 문제가 해결될거라는 헛된 희망을 계속 고집했지만, 이런 희망은 환상에 불과했다는 게 결국 드러나면서 유로존의 신뢰도가 바닥을 치자 2011년 5월 유로그룹의 비밀회의가 룩셈부르크에서 소집되었습니다.

원래 회의의 목적은 단결의 회복이었지만, 채무재조정에 대한 논의가 나오자마자 유럽중앙은행 총재인 장 클로드 트리셰가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로서는 채무재조정에 대한 논의 자체를 묵과할 수 없었거든요. 그가 나가버리자, 회의는 더이상 의미가 없이 파토가 나버렸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막장은 아직 시작도 안했습니다.

언론사 “슈피겔”이 비밀회의였던 유로그룹회의를 눈치채고 기사가 나가자, 이에 미국시장이 폭락하려는 조짐이 보였을 때 유로그룹 의장의 대변인은 당시의 회의 개최여부를 부인했습니다. 노 코멘트가 아니라 아예 거짓말을 한거지요.

그로부터 몇시간 후 같은 대변인이 이번에는 정상들의 만남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기자들은 왜 거짓말을 했는지를 추궁하기 시작했고, 대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앞서 회의개최 사실을 부정한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마침 그때는 월스트리트에서 업무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유로화 가치는 곤두박질 치고 있었고 거짓말을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자기방어행위였다”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가 그런 기만행위 자체가 유로존의 신뢰도를 떨어트리는 행위가 되지 않겠느냐고 질문하자 대변인은 이렇게 응수합니다.

“이미 유럽 중앙은행 총재 장클로드 트리셰와 프랑스 재무부장관 크리스틴 라가르드가 무슨 말을 하든 폄하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 아닌가?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도 믿는것 같지 않은데 떨어트릴 신뢰도가 남아있기는 한건가(그러니 잠시 편의를 위해 거짓말을 한들 무슨 피해가 더 있을것인가)?”

한술 더 떠서 대변인이 아닌 장클로드 융커 유로그룹 의장은 이런 발언을 공개석상에서 하기도 합니다.

“나는 이런 문제(통화정책)일수록 비밀리에 조심스럽게 의논하고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적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는 것에 대해 욕먹을 각오가 되어있다”

이런 헤프닝이 연거푸 벌어지고 있었던 2011년 5월경에는 유로존 내에 그동안 쌓여왔던 주요국간 정책협조채널은 완전히 붕괴해버리게 됩니다. 솔직히 이정도까지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줄 정도였다면 유로존이 당시에 해체되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아닌거라고 봅니다.

좋은 일, 이득이 되는 일 앞에서는 하하호호 어깨동무를 하며 단결을 외치지만, 힘들고 궂은 일이 닥치고 그게 점점 더 심각해지며 위기가 찾아오면 서로 자국이기주의에서 한치도 양보하지 않고 갈라서는 유로존, 그러다가 공멸과 파국의 위기가 눈앞에 닥쳐서야 비로서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며 뒤늦게 정신을 차리는 이런 모습은 이후로도 계속 반복되며 유로존이라는 국가연합체에 본질적인 의문을 더지게 만듭니다.

물론, 당시에는 이런 막장을 연출했던 유로존이라도 지금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같은 공동의 과제와 적을 만나 제법 일치단결하는 구심력을 발휘하기도 하니 세상은 과연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동북아시아의 한중일 3국과 같이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도저히 섞일 수 없어 서로 으르렁거리는 틈바구니에서 분단국가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래도 두차례 세계대전으로 서로 죽고 죽이던 이들이 이런 위태롭고 불완전한 단합이나마 수십년을 유지시키는 리더십과 협상력을 보여주는 모습이 부럽고 대단해 보이고 그렇습니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