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상장사들은 국제회계기준, 즉 IFRS에 따라 회계처리를 합니다. IFRS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원칙중심의 기준체계(Principle-based Standards)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세하고 구체적인 회계처리 방법을 지정하기 보다는 회계담당자가 경제적 실질에 기초하여 합리적으로 회계처리할 수 있도록 기본원칙과 방법론만 대강 제시하고 있습니다. 규제중심의 회계기준은 복잡하고 다양한 현실을 모두 규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의 SK사안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연결재무제표를 작성해야 하는 지배력에 대한 판단기준입니다. IFRS가 도입되기 전에는 A회사가 B회사의 1) 의결권 있는 주식을 50% 이상 소유하는 경우, 2) 의결권 있는 주식의 30%를 초과해 소유하면서 최대주주인 경우, 3) 이사회의 과반수 이상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경우에 A회사가 B회사의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IFRS가 도입되고 나서는 지분비율이 50%가 넘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방법을 통해 B회사를 실질적으로 지배해 이사회를 임명하거나 재무정책과 영업정책을 결정할 수 있다면 종속회사로 간주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지분비율이 50%가 넘어가더라도 다른 이유가 있어서 B회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지 못한다면 연결재무제표를 작성할 필요가 없게됩니다. 지분비율이 50%에 미달하는 경우 실질지배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이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겁니다.
이제 금감원이 문제를 제기한 건 2015년 구SK(주)와 SK C&C 가 합병할 당시 SK C&C의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분식회계를 했다는 겁니다. 오너인 최태원씨가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 SK C&C의 합병비율을 늘리기 위해 썼다고 지적한 방법은 2011년 IFRS 도입 당시 지주사였던 SK C&C 회계를 연결재무제표로 작성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011년 IFRS 도입 전까지는 SK C&C가 보유했던 구SK(주) 나 다른 자회사들의 지분비율이 50%를 넘지는 않았지만 30%이상을 보유하는 최대주주였기 때문에 규정에 따라 자회사들에 대해 지배력을 가지는 것으로 인정해서 자회사를 종속회사로 보고 연결재무제표를 작성했습니다. 그러다 IFRS 도입 후에는 실제 의사결정의 흐름이나 경영방식등을 근거로 실질지배력이 없다고 판단해서 구SK(주)를 SK C&C의 연결범위에서 빼버립니다. 대신 구SK(주)는 다른 자회사들에 대해 실질지배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해 연결재무제표를 작성했죠.
이렇게 종속관계를 인정해 연결재무제표를 작성하게 되면 보유중인 자회사 주식의 가치는 모두 액면가로 계산하게 됩니다. 반면, 종속관계가 인정되지 않아 자회사들을 관계사로 취급하면, 보유 주식의 가치는 모두 시가로 계산하게 되죠. SK C&C의 경우 이렇게 보유주식을 액면가로 계산하느냐, 시가로 계산하느냐에 따라 합병 당시 SK C&C의 자본가치가 1조2천억원 대 1조8천억원으로 무려 50%이상 부풀려지게 됩니다. 구SK(주)의 자산가치는 연결재무제표 기준으로는 77조원이지만 별도재무제표 기준으로는 11조원에 불과하게 되구요. 분식 액수가 66조원이면 위에 기사 제목처럼 사상 최대의 분식회계라는 말이 맞는거지요.
만약 SK 경영진과 오너인 최태원이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SK C&C에 연결재무제표를 작성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최태원 이하 경영진은 다시 한 번 감옥에 갈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합병 당시 구SK(주) 의 주주들 누구도(국민연금만 빼놓고) 그런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정작 반대표를 던졌던 국민연금도 자신들이 마음만 먹으면 합병 자체를 무산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주식매수청구 요구가 1조 이상이면 합병 무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뿐 아니라, 오히려 합병 직전까지 구SK(주) 주식을 계속 사모으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합병 당시 “쑈”만 한번 했던 국민연금 외에는 누구도 이런 합병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데, 정권이 바뀌고 금융감독원에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이 대거 포진된 후 이 부분을 분식회계라 문제삼고 나섭니다. 하지만, 금감원의 이런 주장은 뜻하지 않게 재계에 어마어마한 파장과 논란을 가져오게 됩니다.
금감원이 제기한 분식회계주장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게 된다면, IFRS도입시점에 실질지배력이 없다는 판단하에 기아자동차를 연결대상에서 빼버린 현대자동차, 무려 130여개나 되는 자회사를 연결대상에서 빼버린 LG그룹, 지주사 체제를 취하고 있는 상당수의 국내대기업집단도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분식회계를 저지른게 되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금감원과 재계, 학계의 의견이 대립하고 있던 2019년 한영회계법인이 한미사이언스를 새롭게 감사하게 됩니다. 이 때 한미약품의 주식 41%를 보유하고 있는 한미사이언스가 한미약품에 대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가지고 이전까지 감리하던 회계법인들과 주장이 엇갈려서 한바탕 홍역을 치루자 어떤 회계처리가 옳은지에 대해 회계기준원에 질의를 하게 됩니다.
이 때 회계기준원은 “답변을 줄 수 없는 상황”이라며 질의접수 자체를 거부합니다. 뭐 당연한 결과겠지요.
만약 한미사이언스의 지배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금감원이 지금까지 제기했던 분식회계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뭉게버리는 게 됩니다. 반대로 지배력을 인정한다면? 앞서 말했던 현대자동차, LG 뿐 아니라 지주사 체제를 채택한 대부분의 대기업들을 모두 분식회계라고 공인해버리는 셈입니다. 어느 쪽으로도 답변을 할 수 없으니 정말 말 그대로 “답변을 줄 수 없는 상황”이 맞는거지요.
이 모든 혼선과 혼란은 2019년 증권선물위원회에서 금감원의 판단이 틀렸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반전이 시작됩니다. 이 결정이 내려진 직후인 2020년 1월 한영회계법인은 다시한번 금감원과 회계기준원에 질의를 하며 답변을 요구합니다. 이후 한달동안 무려 200건이 넘는 지배력 관련한 질의가 쏟아졌습니다. 그러자 금감원과 회계기준원은 연석회의를 열고 “지배력에 따른 연결처리 여부는 기업의 판단이고 감사인은 이를 확인하라”는 원칙적인 내용을 발표합니다.
드디어 금감원이 항복선언을 한것이죠.
정말로 사안이 문제가 컸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했다면 언론이나 학계에서 들고 일어나기 이전에 주주들이 들고 일어났을 겁니다. 다름아닌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때 피해를 봤던 주주들이 들고 일어났던 걸 떠올리면 금방 이해가 갈것입니다. 박근혜정권의 사주로 그런 불공평한 합병은 수많은 주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일사천리로 통과되었지만 결국 치부가 드러나 이재용이 실형을 받았지만, SK 합병 과정에서는 그런 반발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점은 사안의 본질이 지극히 정치적인 욕망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걸 짐작하게 합니다.
이렇게 정치적인 동기에서 재벌을 때린답시고 엄한 칼을 휘두를 때 이렇게 회계가 동원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런 사례들의 자세한 이야기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서울대 최종학 교수의 “숫자로 경영하라” 시리즈를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