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싸한 이유를 찾으려는 나쁜 습관

우리나라가 무언가 어려운 일을 당해서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답답해 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시절이 하수상한 때에 갑자기 어떤 사람이 이렇게 우리나라가 시련을 겪을수밖에 없는 그럴듯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정말로 그 이유가 맞는건지, 아니면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이유가 따로 있거나 몇개지의 이유만으로는 그런 현상을 설명하는게 불가능한 건 아닌지, 생산적인 결론을 내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고민해봐야 하는 사안은 아닌지,,, 이렇게 재미없고 길게 끄는 고민들은 그런 속시원한 사이다 발언들에 묻히기 십상입니다.

어떤 사안도 깊게 고민하는걸 싫어하고, 자신의 자존감을 지지하는 주장이라면(국가적인 위기상황이면 국민들의 자존감이 얼마나 상처받기 쉽겠습니까?) 그게 설령 거짓이라 할지라도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있는 대중은 어떤 현상의 이유가 간단한게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97년 외환위기로 나라 경제가 풍비박산 났을 때 그 이유를 “외국자본의 음모”라는 한마디로 설명하는 주장들이 그렇게 인기를 얻었던 것이고,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미네르바라는 사기꾼의 헛소리를 여전히 믿고있는 사람들이 있는겁니다.

반대로, 우리나라가 어떤 영역에서 지금 잘나가고 있는것에도 “그럴듯한”,,, 정확히는 우리의 자존감을 지지하고 기분을 좋게 해주는 이유를 제시하고 “우리는 이런걸 누릴 자격이 있는 국민” 내지는 “이걸 누릴 자격이 있는 민족”이라는 자긍심을 자극하는 설명에 환호하든지,,, “그런 이유도 어느정도는 있지 않겠어?”라는 식으로 어느정도 동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조금만 고민해봐도 반론이 가능한 설명들을 기분이 좋아진다고 해서 거부감 없이 받아들다 보면, 시간이 흐르고 나서 손발 오그라드는 부끄러움과 자괴감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례로 대만이나 홍콩, 싱가포르, 우리나라가 “아시아의 4마리 용”이라 불리며 고속성장을 거듭하던 때 이들이 왜 잘나가는가에 대한 이유를 이들 나라의 유교적 전통을 들고 나와서 “유교 자본주의”라는 레토릭을 유행시키던 90년대 초반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네, 그렇게 빚과 과잉투자로 쌓아가던 영광에 그럴싸한 이유를 붙여가며 오만과 방심에 빠져있다 외환위기에 빠져 나락으로 떨어졌던 네마리 용들, 지금 돌아보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레토릭이죠.

시급했던 구조조정과 정치적 민주화일정을 미뤄가며 중국이 급속도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꿀을 빨아가는 건 당연한 거고, 네마리 용들의 막강한 경쟁자가 될거라는 생각은 막연히 하지만 고통을 감수해가며 거기에 대비하려는 각오는 하기 싫은 위정자들에게 딱 맞아떨어지는 그럴싸한 레토릭, 우리는 원래부터 잘났다는 자존심 넘치게 만드는 잘난 레토릭에 안주했던 게 외환위기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적절한 대응을 못하게 막아선 장애물로 작용했던 겁니다.

그렇게 모든 문제를 남 탓으로 돌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치뤄야 할 대가를 지불하는걸 억울해해는 건 결국 돌고 돌아 더 큰 고통을 자초하는 나쁜 습관입니다. 정치적으로 민주화가 덜 되어있는 국가일수록 그런 나쁜 습관에 빠져들기 쉬울수밖에 없는게, 유권자들이 계속 지금처럼 자존심에 집착하면서 멍청하고 잘 속아주어야 자신들의 권력을 연장해갈 수 있거든요.

물론, 이런 성향 자체는 인간의 본능에서 나오는 현상이기에 미국, 중국같은 초강대국을 포함해 대부분의 나라들이 여기에서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유권자들의 평균적인 지적 능력과 자존감, 그리고 주인의식이 어느정도 수준이냐에 따라 그러한 본능적인 성향이 얼마나 제어되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여론이 형성될 수 있는지가 결정되는 거겠지요.

중국 공산당이 요즘 중국 인민들을 현혹시키는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조장하느라 열심이고, 지금은 소기의 성과를 거둬 중국 젊은이들의 비뚤어진 역사인식과 배타적인 성향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중국의 미래는 이로 인해 반드시 대가를 치루게 되겠죠. 하지만, 중국의 안타까운 미래를 예견하며 혀를 차기에는 당장 우리나라도 문제가 많습니다.

“국뽕”에 취해있는 사람들이 많기로는 우리나라도 못지 않은 상황이니까요.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