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본성대로 멋대로 놀고, 함부로 날뛰면서도 편안해하고, 금수와 같은 행위를 하므로 예의에 맞지 않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통하지 못함에도 주장에 근거가 있고 말에 조리가 있어 족히 우매한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케 하는 사람이 타효와 위모이다.
- 억지로 본성을 누르고 말은 의미심장하면서 행동은 괴벽하며,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을 고상하게 여겨 대중과 화합하지 못하고 신분의 큰 구분을 지킬 수 없음에도 주장에 근거가 있고 말에 조리가 있어 족히 우매한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케 하는 사람이 진중과 사추이다.
- 공리를 숭상하며 지나치게 검약하고, 차등을 두지 않아 일찍이 사람 사이에 구별이 있고 군신간에 차이가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음에도 주장에 근거가 있고 말에 조리가 있어 족히 우매한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케 하는 사람이 바로 묵적과 송견이다.
- 법을 숭상한다면서 예의의 준칙이 없고, 도덕 수양을 멸시하고 법 만들기를 좋아하며, 위로는 구주의 말만 듣고 아래로는 구차히 습속이나 따르면서 온종일 법률 조문을 이야기하고 반복하여 헤아리는데, 내용이 요원하기만 하고 결말이 없음에도 주장에 근거가 있고 말에 조리가 있어 족히 우매한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케 하는 사람이 바로 신도와 전병이다.
- 선왕을 본받지 않고, 예의에 찬동하지 않으면서 괴상한 주장하기를 즐겨하고, 기이한 말로 희롱하며, 말은 잘하나 실용성이 없으며, 일은 많으나 공은 적어 치국의 원리로 삼을 수 없음에도 주장에 근거가 있고 말에 조리가 있어 족히 우매한 사람을 속이고 미혹케 하는 사람이 바로 혜시와 등석이다.
- 대략 선왕을 본받긴 하나 그 통류를 알지 못하고, 장엄하게 재주가 많고 뜻이 크며, 듣고 본 것은 잡스럽고 넓어 옛 일에입각해 새로운 주장을 만들어내 오행이라 불렀는데 크게 치우치고 체계가 없으며, 명확하지 않아 설명할 수 없고, 뜻이 통하지 않아 이해할 수 없음에도 그 말만 잘 꾸며대면서 “이것이야말로 진짜 군자의 말씀이다”라고 한다. 자사가 부르짖고 맹가가 이에 화답했다. 속세의 어리석고 무지한 유생들이 떠들썩하여 그것이 잘못임을 알지 못하고 차츰 받아들여 전파하면서 중니, 자궁이 후세에 존중받음이 이 때문이라 하니 바로 자사와 맹가의 죄이다.(맹가는 맹자, 자사는 맹자의 스승)
- 송곳 꽂을 땅도 없었으나 왕공대인이라도 감히 그와 더불어 이름을 다툴 수 없었으며, 일개 대부의 자리에 있었으나 한 군주만으로는 그를 봉양할 수 없었고 성대한 명성만으로도 제후들에게 도움이 되어 그를 신하로 삼고 싶어 하지 않는 군주가 없을 정도로, 성인이면서 권세를 얻지 못했던 자가 바로 중니와 자궁이다.(중니는 공자의 자, 자궁은 공자의 제자로 순자, 한비자로 이어지는 법가의 계보로 이어짐)
- 믿을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며, 의심할 것을 의심함도 믿음이다. 현명함을 받드는 것이 어짊이며, 어리석음을 천시하는 것도 어짊이다. 마땅하게 말하는 것도 지혜이며 마땅하게 침묵하는 것도 지혜이니 침묵을 아는 것은 말할 줄 아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말이 많아도 모두 예의 통류에 합치하면 성인이고 말이 적어도 예법에 맞으면 군자이다.
- 말은 많으나 법도가 없고 깊이 빠져 헤어나지 못하면 비록 말을 잘하더라도 소인이다. 따라서 힘을 쓰되 백성의 업무에 맞지 않으면 간사한 일이라 하고, 지혜를 쓰되 선왕의 법도를 본받지 않으면 간사한 마음이라 하고, 말과 비유를 잘하며 민첩하고 신속하나 예의를 따르지 않으면 간사한 말이라 한다.
- 천하의 마음을 두루 복종시키려면 존귀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잘난 체하지 않으며, 지혜가 있더라도 다른 사람을 몰아세우지 않으며, 민첩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앞서려 다투지 않고, 용감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으며, 알지 못하면 물어보고, 할 수 없으면 배우며, 할 수 있더라도 양보한 뒤에라야 덕을 갖추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아는 성현인 공자의 실제 이름은 孔丘(공구), 자는 仲尼(중니)입니다. 맹자의 실제 이름은 孟軻(맹가),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 자거(子居), 자전(子展) 등입니다. 성현의 존칭으로 공자, 맹자 이렇게 부르니 무언가 대단한 깨달음이 있고 그들의 말에 필시 고상한 진리가 포함되있을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배우기 전에, 이들이 정말 높고 대단한 “이름”에 걸맞는 성취를 이루어서 우리가 그들을 본받고 배울 가치가 있겠는가를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순자가 다른 제자백가들의 가르침보다 더 우월한 점은 그의 집요한 “관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생각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관조가 아닌 끊임없는 비판과 비교를 통해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고 사유하는 관찰이 있었기에 그의 주장에는 극단으로 치우치거나 공허한 사색에 빠지지 않고 인간의 본질을 간파합니다. 그렇게 인간의 본질을 간파했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을 극단적으로 거부하거나 수용하는 양극단의 접근법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할 수 있었던 거지요.
이러한 중용의 도는 비단 철학의 영역에서만 적용가능한 관점이 아닐겁니다. 인간의 본성, 즉 인간의 심리와 본능을 제어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투자의 영역에서도 순자가 역설한 통찰이 통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순자가 자사와 맹자를 비판할 때 동원하고 있는 잣대는 지금 투자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깊게 되새겨봐야 하는 기준이 됩니다. 다른 제자백가들을 비판할 때에는 “주장에 근거가 있고 말에 조리가 있어 족히 우매한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케 한다”라고 말하지만, 자사와 맹자를 향해서는 “크게 치우치고 체계가 없으며, 명확하지 않아 설명할 수 없고, 뜻이 통하지 않아 이해할 수 없음에도 그 말만 잘 꾸며댄다”라고 공격합니다.
명확하지 않은 언동, 근거가 없는 부실한 논증, 얼핏 들어보면 뭐가 있어보이지만 조금만 들여다봐도 모호하고 체계가 없는 주장,,, 우리가 가장 혐오하고 거부해야 하는 유형의 주장들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전문가인체 하는 이들이 지금 이순간에도 쏟아내고 있는 말들의 상당수가 이에 해당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연과학에 못지 않게 투자영역에서 필요한 것이 이와 같은 엄정한 비판의식, 그리고 근거와 검증에 바탕을 둔 관찰에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순자의 통찰과 가르침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움직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