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가 읽는 순자 “예론(禮論)”

맹자가 말하는 예(禮)는 주인과 손님 사이의 공손함 정도로 설명합니다. 인간의 선한 본성을 거스르지만 않으면 별다른 노력 없이도 자연스레 드러나는 피동적인 표상의로 봤기에 예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죠.

“시경에서 말하길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낳았고,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듯이, 색성의 마음에 떳떳한 본성이 있어,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 것이다” – 맹자 고자편

“시경에서 말하는데, 상의 자손이 그 수가 억을 넘지만 상제(하늘)가 이미 명(천명)하니 주나라에 복종하는구나” – 맹자 고자편

맹자의 주장대로라면, 조상에 제사로 예를 다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새겨져 있는 것이니 당연한 것이고, 하늘이 만물과 백성을 낳은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듯 죽은 뒤의 조상도 당연히 실재하는 실체여야 합니다. 유교 전통이 주장하는 제례는 그 자체로 폐기될 수도, 변형될 수도 없는 종교적인 도그마에 편입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는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말하기를 사람은 나면서 욕망을 갖는다. 욕망을 가지고 얻지 못하면 구하지 않을 수 없다. 구하면서 기준과 한계가 없으면 다투지 않을 수 없다. 다투면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워지면 궁해진다. 선왕은 그 어지러움을 싫어한다. 그래서 예의를 제정하여 구분을 짓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의 욕망을 기르고 사람의 욕구를 채우며 욕망으로 반드시 사물에 궁하지 않게 하고 사물의 욕망에 굴하지 않게 하여 양자가 서로 버티며 자라게 하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가 일어나게 되는 바 기원이다. 그러므로 예는 기르는 것이다.” – 순자 예론편

“목숨을 내던져 절의를 세우고자 함이 사실은 그로써 삶을 기르려고 하는 것임을. 돈을 쓰는 것이 사실은 그로써 재화를 기르려고 하는 것임을. 공경하고 사양함이 사실은 그로써 안전을 기르려고 하는 것임을. 예절과 꾸밈, 도리를 지킴이 사실은 그로써 성정을 기르려고 하는 것임을” – 순자 예론편

“사람이 구차하게 살기만을 바란다면 그런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고, 구차하게 이익만을 꾀한다면 반드시 손해를 입을 것이고, 구차히 게으르고 나약함을 편안히 여긴다면 반드시 위험에 빠질 것이고, 구차히 제멋대로 뜻대로 하며 즐거워한다면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이다” – 순자 예론편

반면 순자가 말하는 예(禮)는 맹자가 설명하는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순자의 예는 오히려 사람의 본능과 욕망을 온전하게 해주는 행위, 즉 인간의 본능을 올바로 이끌어내는 행위나 방법으로 설명합니다. 맹자가 본성에서 예가 드러나는 식으로 설명하는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설명입니다.

순자가 예를 당연시하거나 반드시 지켜야 하는 신성한 것으로 종교화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제나라의 직하학궁의 제주를 3번이나 역임한 대학자 출신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제는 고사성어처럼 되버린 “직하학궁(稷下學宮)”이라는 제나라의 학문기관 안에서는 유능한 인재라면 누구라도 자유롭게 사상을 펼치고 학문을 추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직하학궁의 다양한 문화와 학문을 접한 그로써는 하늘은 단지 자연일 뿐, 더이상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거나 인격화된 무엇으로 인식될 수 없었던 거지요. 그 점이 공자와 맹자가 바라보는 하늘(天)에 대한 관점에서 진일보한 부분일겁니다.

그렇기에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제사의 관습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도 맹자의 그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끝과 시작이 한결같으니 이것이 군자의 도이며 예의 형식이다. 무릇 그 탄생은 두터이 여기면서 죽음은 가벼이 여긴다면 이는 살아서 지각이 있을 때는 공경하나 죽어서 지각이 없어지면 업신여기는 셈이니 이는 간사한 사람의 도이며 배반의 마음이다.” – 순자 예론편

“죽음으로 가는 길은 한 번뿐 다시 반복될 수 없으니 신하는 군주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최고의 존중을 드려야 하는데, 그 할 바를 여기에서 다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전에 섬김에 충성, 돈후하지 않고 공경하여 형식을 갖추지 않으면 그를 야비하다고 말한다. 상을 치름에 충성, 돈후하지 않고 공경하여 형식을 갖추지 않으면 그를 척박하다고 말한다. 군자는 야비함을 천하게 여기며 척박함을 부끄러워한다.,,, 이로써 공경의 예를 갖추어 삶과 죽음을 시종여일하도록 하니 한결같이 모든 사람의 바람을 만족시킨다. 이것이 선왕의 도이며 충신 효자의 극치이다.” – 순자 예론편

순자는 귀신이 실제로 존재하고, 조상과 열조(선대 군왕들)의 혼이 제사로 위로를 받기 때문에 제사에 성의를 다하라 하지 않습니다 . 오직 예를 위해, 앞서 설명했듯 (귀신을 믿든 믿지 않든)모든 사람의 바람을 만족시키고 이익을 지켜주기 위해 죽은 이를 향하여 살아있을 때와 같이 공경하라고 가르칩니다.


이와 같이 순자가 말하는 예(禮)는 특정한 복식이나 행동거지, 각종 행사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대한 지침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나 자신만이 아닌 내 가족, 내가 속한 사회와 국가의 모든 사람들의 욕망과 이익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이기심과 배타적인 태도에 의해 발생하는 혼란을 제어하고 화평하게 하려는 모든 아이디어와 실천을 예(禮)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투자자로서의 예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투자자로서 마땅한 예를 고민해봄직하다 말할 수 있을것입니다.

내가 구차하게 나 자신의 욕망과 이익만을 꾀하기 위해 투자를 한다면 반드시 손해를 입을 것이라고 순자가 예론편에 경고한 것을 귀담아 들어 “돈을 쓰는 것이 사실은 그로써 재화를 기르려고 하는 것임을” 이루는 경치를 추구하는것이야말로 투자자가 취해야 할 “투자의 예(投資之禮)”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러한 예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첫걸음이 중요할 것입니다. 예가 사라져 혼란해진 세상을 싫어고 그러한 혼란을 미워하는 마음을 투자로서 이루는 거창한 최종단계를 이루기 전에 나 자신부터 눈 앞의 욕망과 이익에 집착해서 그러한 혼란에 집어삼켜지는 것을 경계하고 미워하며 거기에서 돌이키는 것이 그 첫걸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의 첫걸음은 수신이고, 수신이 되어야 제가, 치국, 평천하를 이룰 수 있는것이죠.

이를 위해서 투자하는 동안 자신만의 명확한 원칙을 세우고, 실천과 검증을 통해 그 원칙을 업그레이드해서 마침내 다른 이들도 따르고 본받기에 충분할 정도로 빛나게 하는 것이 투자자가 추구해야 할 수신의 첫단계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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