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가 읽는 순자 “성악(性惡)”편 – (1)

사람의 본성은 악한데, 선해짐은 인위 때문이다.

지금 사람의 본성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함이 있는데, 이를 그대로 좇으므로 쟁탈이 생겨서 사양이 사라진다. 나면서부터 질투하고 미워함이 있는데, 이를 그대로 좇으므로 서로 해쳐서 진실과 믿음이 사라진다. 따라서 사람의 본성과 성정을 좇으면 반드시 쟁탈이 일어나 사회의 구분을 무너뜨리고 이치를 어지럽혀 폭동으로 귀결된다.

맹자는 “사람이 배우게 됨은 그 본성이 선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그렇지 않다. 이는 사람의 본성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본성과 인위가 구분됨을 헤아리지 못한 때문이다. 본성은 배워서 할 수 없다. 눈은 본성대로 볼 수가 있고 귀는 본성대로 들을 수가 있다. 눈이 밝고 귀가 잘 들림은 배워서 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은 선한데 지금 악해진 것은 모두가 그 본성을 잃어버린 까닭이다”라고 말한다. 이같이 주장을 한다면 잘못이다. 지금 사람의 본성이 나면서부터 자연적인 질박함을 떠나고 고유한 바탕을 벗어낫다고 말한다면 본성 자체가 반드시 소멸되어 없어진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이 되고 만다.

어떤 사람은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면 예의는 어디서 생기는가?”라고 묻는다. 무릇 예의란 성인의 인위(인위적인 조작)에서 생겨난 것이지 사람의 본성에서 본래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다. 도공이 진흙을 반죽하여 그릇을 만들었다면 이 그릇은 도공의 인위에서 생겨난 것이지 사람의 본성에서 본래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렇지 않다. 무릇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천하에 이른바 “선(善)”이라 함은 올바르게 잘 다스려지는 것을 가리키며, 이른바 “악(惡)”이라 함은 치우쳐 위험하고 사리에 어긋난 혼란스러움을 가리킨다. 지금 참으로 사람의 본성이 본래부터 올바르게 잘 다스려지는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성왕은 무슨 쓸모가 있으며, 예의는 또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무릇 이익을 좋아하면서 더 많이 얻고자 하는 것, 이것이 사람의 성정이다. 가령 아우와 형이 재물을 두고 나눌 일이 생겼다고 하자. 성정에만 따른다면, 즉 이익을 좋아하고 더 많이 얻고자 한다면, 형제가 서로 떨쳐 일어나 빼앗을 것이다. 그런데 예의의 형식과 이치에 의해 교화되었다면 나라 안의 어떤 사람에게라도 사양할 것이다. 그래서 성정을 좇으면 아우와 형도 다투고, 예의로 교화하면 나라 안의 관계 없는 사람에게도 양보한다.

그래서 옛것에 대해 잘 이야기하는 사람은 반드시 오늘의 사실로 검증을 하며, 하늘에 대해 잘 설명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의 일로 검증을 한다. 무릇 논의하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분석과 종합이며, 그에 부합하는 검증이 있어야 한다.

지금 맹자는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분석과 종합 그리고 그에 부합하는 검증이 없고 일에 대해 앉아서 이야기하지만 일이 일단 일어나면 바로 배치할 수 없고 펼쳐서 실행에 옮길 수 없다. 이 어찌 잘못이 매우 심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본성이 선하다고 함은 성왕을 버리고 예의를 폐지하겠다는 것이며, 본성이 악하다고 함은 성왕을 따르고 예의를 중시하겠다는 것이다.


기원전 중국에 살던 사람이 이토록 통쾌하고 명징한 논리로 맹자의 성선설을 반박하고 비판했는데, 왜 맹자의 성선설이나 맹자의 다른 가르침들이 유교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는지 개인적으로 의문스럽습니다. “옛 것에 대해 잘 이야기하는 사람은 반드시 오늘의 사실로 검증하고, 하늘에 대해 잘 설명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의 일로 검증을 해야 한다”는 검증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부분을 읽을 때에는 유학의 고루함이란 후대 사람들의 고루하고 몽매한 행실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만드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당대의 위정자들 입장에서 정치적인 목적에 유용하면 살아남고, 그렇지 않으면 사장되는 세태가 맹자를 숭상하고 순자를 은근히 도외시하는 우리나라 유교전통을 만들었을거라 짐작하고 남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역성혁명”을 명분으로 고려를 멸망시켜 만든 나라이니 맹자를 숭상함은 당연한 수순이었겠죠.

생각해보면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한 것자체가 역성혁명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를 개발하러는 목적에서 출발한 사상이었습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착한 본성이 있고,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들 그 착한 도리를 지키며 살아가는데 왕후장상을 차지하고 있는 저들이 하는 짓은 인간의 본성에서 한참 어긋나 있으니 과연 저 금수같은 존재들을 사람으로 치부하여 고대의 전통과 예법에 준거해 대하여줄 이야가 있겠는가 하는거지요.

신하가 군왕을 죽이는 것이 가하지 않다는 예법을 무시하고 신하가 되어 군왕을 죽이고 혁명을 하는것이 정당하다고 강변하려니 일단 도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군왕을 사람의 범주에서 빼놔야 하기에 성선설을 주장한 것이지 세상의 이치를 관찰하고 하나하나 따져 검증하고 종합한 끝에 합리적인 분별 끝에 내린 결론이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

제선왕 : 탕왕이 걸(桀)을 쫓아내어 가두고, 무왕이 주(紂)를 정벌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 : 옛 기록에 있습니다.
제선왕 : 신하가 자기 왕을 죽여도 됩니까?
맹자 : 인(仁)을 헤치는 자를 적(賊)이라고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고 합니다. 잔적(殘賊)을 일컬어 한 사람의 필부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필부인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왕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

맹자에 나와있는 이 유명한 대화 하나를 명분삼아 얼마나 많은 쿠데타와 반란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살육과 전쟁의 어지러움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한다면 맹자의 이 역성혁명이라는 괴물과 이를 정당화 하기 위해 아무런 검증이나 관찰 없이 불쑥 내밀어진 성선설이라는 대전제도 유학이 이어받아야 할 유산이 아니라 배격해야 할 오류로 결론내려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두가 너무 길었지만, 순자의 이러한 사유와 논리전개를 통한 인간 본성의 악함과 이에 따른 인위적인 교화와 교육의 필요성을 증명한 전개는 투자자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투자자라는 인간유형은 끊임없이 훈련과 경험을 통해 매순간 본능을 거스리는 결정을 반복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성선설이 옳은것이라면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존재이자, 성악설이 진실이었을 때 비로서 도전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가 될 수 있는거지요. 끊임없이 배우고, 자기를 돌아보며 자신의 생각과 결정이 올바른것이었는지 검증하는 것을 반복하는 투자자야 말로 21세기 지식사회의 총아이자 인공지능이 넘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자 경지일 것입니다.

뒤집어 생각하자면, 끊임없이 학습하고 자신의 생각과 전략을 결과로 검증하지 않는 투자자, 본능과 감정에 충실한 채 어지럽게 매매를 반복하며 원칙이나 가고자 하는 방향이 없이 떠돌이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새로운 유행을 찾아 돌아다니는 투자자, 내 이럴 줄 알았다며 후견지명과 자기 합리화와 음모론에 젖어서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투자자는 결코 악한(치우쳐 위험하고 사리에 어긋난 혼란스러운) 본능에서 자유로운 존재, 제대로 된 투자자라고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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