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의 지혜가 있고, 사군자의 지혜가 있으며, 소인의 지혜가 있고, 비천한 일꾼의 지혜가 있다.
말을 많이 하더라도 점잖고 조리가 있으며 종일 그 까닭에 대해 논의함에 말이 천변만화해도 큰 줄기(통류)로 일관되는 것, 이것이 성인의 지혜이다.
말을 적게 하면서도 단도직입적이고 간결하며 순서가 있고 예법에 맞으며 마치 먹줄로 바로잡은 듯한 것, 이것이 군자의 지혜이다.
말은 황당하고 행동은 사리에 어긋나며 일을 함에 허물이 많은 것, 이것이 소인의 지혜이다.
말은 청산유수고 행동은 민첩하나 조리가 없고, 잡박한 능력이 광대하지만 쓸모가 없고, 분석이 빠르고 논의가 숙련되어 있으나 급한 수요에 맞지 않고, 옳고 그름도 돌보지 않고 곡직을 불문한 채 다른 사람에 이기는 것만을 기약하여 만족해하는 것, 이것이 비천한 일꾼의 지혜이다.
용감한 사람에도 상중하의 세가지 사람이 있다.
천하에 올바른 중도가 있으면 과감히 제 몸을 곧추세워 나가며, 위로 난세의 군주에게 순종하지 않고 아래로 난세 백성들의 습속에 젖지 않으며, 천하가 그를 알아주면 천하와 더불어 즐거움을 같이 누리고자 하며, 천하가 그를 알아주지 않으면 굳건히 홀로 서서 천지간에 두려움이 없는 것, 이것이 상등의 용감함이다.
예의 공손하고 뜻이 겸손하며, 신의를 매우 중시하고 재화를 가벼이 여기며, 현자에 대해 감히 추천하여 위로 올리고 어리석은 자에 대해서는 감히 끌어다가 그만두게 하는 것, 이것이 중등의 용감함이다.
제 몸을 가벼이 여기고 재화를 중시하며, 재앙에 편안해하고 여러 방법으로 스스로 널리 벗어나 구차히 면해보려 하며, 옳고 그름이나 그렇고 그렇지 않음도 돌보지 않은 채 다른 사람에 이기는 것만을 기약하여 만족해하는 것, 이것이 하등의 용감함이다.
순자가 다른 곳이 아닌 성악편에서 “지혜”에 대해 굳이 이야기 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습니다. 순자의 성악편은 주된 내용이 맹자의 성선설을 비판하고 반박하는 논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실 순자가 성악편을 집필안 목적은 자신의 성악설이 옳다는 이야기를 하려거나 맹자가 틀렸다, 성선설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게 진짜 목적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을 여러 측면에서 비판하고 지적함을 통해 참된 지혜와 예의(禮)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사람들이 미루어 짐작하고 이해하게 도와주려 했던 것이라 봅니다. 성악편에 들어있는 순자의 주장들은 모두 “논리전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순자는 시종일관 군자의 생각은 검증이 가능해야 한다고 믿고 자신도 그러한 생각을 다른 사람들이 검증할 수 있도록 간결하고 명확한 논증을 통해 진술합니다. 그렇게 검증하고 이해하기가 쉬워야 세상에 그 말을 널리 전하더라도 뜻이 왜곡되지 않고 곧바로 사회에 적용되어 실천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순자의 관점에서 전국시대의 사상과 주장들 중 가장 가증스럽고 배격해야 하는 생각은 검증하기 애매하고 뭐라 지적하기 모호한 주장, 근거가 명확하지 않으면서도 화려한 언변과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쉬운 레토릭이었고, 그런 애매모호한 주장의 전형이 다름아닌 맹자의 공자해석 내지 유교해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전에 순자가 충분히 논증하고 지적했듯 맹자가 주장한 성선설은 소인의 지혜에 더없이 부합한 형태라고 볼수도 있을것입니다. 일단 그 논리가 이미 검증되었듯이 황당하고, 그런 황당한 생각에서 출발해서 행동을 일으켜 실천하려들면 결국에는 사리가 들어맞지 않게 되며, 그런 식으로 평소에 검증되지 않은 사상을 무분별하게 따르는 이들의 행동 또한 허물이 많아질 수밖에 없을게 분명하니까요.
왜 유교가 수천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왔음에도 2백년을 갓 넘긴 과학철학을 능가하거나 경쟁할만큼 진화하지 못했는가를 되짚어본다면, 논증과 엄격한 비판을 통해 틀린 것을 확실히 배제하고 잘못된 것을 정확히 수정함을 통해 가지치기를 해가는 과정에 완벽하리만치 무관심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맹자의 성선설과 거기에서 파생된 역성혁명이 제공하는 정치적인 유용성이 너무 컸기에 순자를 도외시하고 맹자의 잘못된 부분을 받들어 모심으로 논증과 검증을 폐하고 공자를 왜곡함을 통해 정체와 퇴행을 거듭했기 때문에 그 긴 시간을 헛되이 낭비해왔던 게 아닌가 합니다.
굳이 투자자가 아니라도 검증과 과학을 업으로 삼는 이들, 자신의 본능과 편견에 사로잡혔을 때 크게 실패하기 쉬운 일을 하는 이들, 단기적으로 자신의 판단을 흐리고 현혹시키는 노이즈에 항상 둘러싸여서 자칫 “그럴듯한 말”, “순발력”, “빠른 판단”과 “숙련된 논리”만 가지고 일을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성급함과 게으름에 빠지기 쉬운 우리들에게 무엇이 진짜 지혜인지에 대해 지적하는 순자의 네가지 지혜와 세가지 용기에 대한 고찰은 분명 중요한 깨달음 제시해줄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