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에 정박효과(anchoring effect)라는 게 있습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와 제일 처음 본 생물체를 엄마로 인식하는 각인효과처럼 맨 처음 접했거나 익숙해진 가격을 기준으로 가치를 평가하려는 본능을 정박효과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에 항상 익숙해져있는 사람이 갑자기 스타벅스 커피를 처음 접하게 되면, 아무리 커피 원두가 더 양질이고 분위기가 좋더라도, 스타벅스의 3000원짜리 커피를 비싸다고 판단하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소비자가 그러한 정박효과를 극복하고 스타벅스의 3000원짜리 커피가 “비싸지 않다”라고 느끼게 하려면 300원짜리 자판기커피와 비교할 수 없는 차별점을 그만큼 장기간에 걸쳐 충분히 인식시켜주어야만 한다는 거지요. 반대로, 일단 소비자들이 스타벅스 커피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지기만 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후발주자들이 더 싼 가격으로 승부를 하더라도 어지간해서는 경쟁이 안됩니다. 이미 당연하게 여겨져버린 3000원이라는 커피 가격보다 더 싸게 커피를 판다고 해도 기준이 되버린 스타벅스의 서비스나 분위기 대비 우월한 차별점이 존재하지 않는 한, 다른 커피가 가성비가 높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박효과의 무서움은 주식 투자자들에게도 굉장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평소에 1만원정도 하던 특정 종목이 무슨 이유에서건 갑자기 10%정도 떨어진 9만원으로 가격이 떨어지는 경우 사람들은 “싸졌다!” 라고 느끼고 이 주식이 왜 이렇게 떨어졌는지를 고민하기 전에 일단 줏어담고 나서 고민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싸진 주식을 9만원 주고 샀는데, 이제 주가가 회복하지 않고 8만원으로 더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순식간에 정박효과에 의해 형성되는 기준가격은 10만원이 아닌 8만원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제는 “8만원짜리를 9만원에 사버렸다”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다시 9만원으로 가격이 회복되지 못할것처럼 착각하면서 손절을 하는 경우도 있고,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놓치지 않고 버텨야 한다는 생각을 실천하지만, 그 8만원이 9만원으로 회복되는 걸 지켜보는 기간 내내 심리적으로 큰 데미지를 입게 됩니다. 꼴랑 8만원짜리를 9만원에 사버린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신을 탓하게 되고, 주식에 대한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기도 하지요.
이렇게 8만원으로 앵커링 되버린 주식이 다시 9만원으로 오르게 되면, 다시 10만원으로 오르거나 그 이상으로 올라갈 가능성을 평가절하하게 되면서 번전을 되찾는 시점에 내다 던지기 십상입니다. 일단 정박효과에 의해 주식을 사게 되면, 그 주식을 보유하고 처분하는 내내 정박효과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지기가 어려운겁니다.
그런데, 정말로 주가가 가치 대비 싸게 가격이 떨어졌다 판단해서 저가매수를 하는 가치투자와, 무의식적으로 정박효과의 올무에 걸려서 별볼일 없는 주식을 단지 싸다는 이유로 사게 된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일단 주식의 본질가치를 논하는 건 저로서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에 다른 방향, 즉 정박효과에 의해 주식을 사게 된건지를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체크포인트를 고민해보는게 필요할 겁니다. 맨 윗줄에 링크로 달은 정박효과에 대한 논문을 보면 정박효과가 극대화되어서 스스로 자충수를 두기 쉬운 국면이 나오는데, 지금 내 심리상태가 이런 위험한 국면에 빠져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 이런 정박효과에 의해 비이성적인 거래를 하지 않게 도와줄겁니다.
논문에서는 정박효과 극대화되는 세가지 요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쾌락적 목적을 가진 소비
2. 자기규제적 자원이 고갈된 상태에서의 결정
3. 충분한 시간지연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
그렇다면, 이러한 요인을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 정박효과에 의한 실수를 줄이는 데 필요합니다. 일단 주식거래를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은 없을거라 단정하고, 자기규제적 자원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자기규제적 자원이라는 건 쉽게 말해서 자제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에너지입니다. 이런 자기규제적 자원은 의사결정을 직관적인 생각에 의해서 내리지 않고 노력을 들여서 하는 사람일수록 훨씬 많은 양을 확보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더해 정신적으로 지치고 힘든 상태일수록 이런 자원이 훨씬 쉽게 고갈된다고 합니다.
여기에 덧붙혀서 의사결정을 하는 타이밍도 중요합니다. 가격이 기존에 형성되고 있던 수준보다 떨어졌다는 정보를 접하자 마자 결정을 내리는 습관을 고치지 못한다면, 이런 정박효과에서 자유로워질 방도는 없습니다. 보통 한번 정해진 정박효과가 깨지고 새롭게 형성된 가격이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데 걸리는 시간이 한달정도라고 합니다. 자판기 커피만 마시던 사람이 호기심에 스타벅스에 몇 번 들리다가, 어느새인가 스타벅스 커피 가격을 아무런 고민 없이 자연스럽게 지불하게 되는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그정도가 맞을겁니다.
물론, 무조건 정박효과의 지속시간이 한달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전부터 해당 종목의 가치에 대해 고민해왔던 사람이라면, 한달이라는 기간이 전혀 필요없겠고, 아무런 고민을 안하는 사람이라면 한달도 짧은 시간이겠죠. 어찌되었든 이런저런 가격의 등락에 휩쓸리지 않고 해당 주식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길때까지 기다리고 연구하는 데 어느정도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걸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