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시 전쟁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지만, 극적으로 로마가 승리했다는 역사를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겁니다. 그런데, 당시 한니발의 이탈리아 침공을 보면 의아한 면이 있습니다. 원래 로마를 침공하기 위해 징발했던 병력이 보병 3만8천에 기병이 8천, 그리고 코끼리가 37마리였지만, 알프스 산맥을 넘는 과정에서 크게 손실을 봐서 이탈리아 북부에 도착한 병력은 고작 보병이 2만, 기병이 6천으로 줄었으며, 정작 코끼리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폐사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병력은 본진이었기 때문에 평시에도 8만명 이상의 보병이 이탈리아 반도에 주둔 중이었으며, 약간의 시간만 확보한다면 주변의 속주에서 훨씬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한니발이 번번이 로마군을 격파하며 북이탈리아를 휩쓸고 다녔음에도 칸나이 전투 때 로마군은 9만의 병력을 동원해서 결전에 임했었죠. 아무리 정예병이라 해도 애초에 숫자가 게임이 안되는 싸움이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과감하게 로마군에게 공세를 이어갈 수 있었느냐는거죠.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추측도 무리가 있는게 카르타고와 거리상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던 데다 카르타고 본국의 상황도 넉넉하지 않았기에 보급이 쉽지 않았을것이라는 건 알프스를 건너기 전부터 알고 있었을겁니다. 실제로도 병력충원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구요.

그랬는데, “동맹시 전쟁”이라는 역사를 알게 되면서 한니발의 전략이 이해가 되더군요. 이탈리아 반도 내에는 로마만 존재했던 게 아니라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로마의 동맹으로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니발이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하면서 몇 번만 군사적인 승리를 거둔다면, 이들 도시들이 로마에 등을 돌리게 할 수 있었다는 계산이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각개격파 내지 자중지란에 빠지게 만든다면 로마를 고립시키고, 역으로 카르타고 본국과 곳곳의 요충지에 진을 치고 있던 로마 군대의 후퇴를 강요할 수 있다고 봤던 거지요.

그런데, 한니발이 실제로 연전연승 하면서 결정적으로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을 거의 궤멸시켜버리는 전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동맹은 끝까지 굳건했고, 와해되지 않았습니다. 칸나이 전투 직후에는 칸나이지역 남부의 도시들이 이탈해서 한니발에게 돌아서긴 했지만, 이후에는 오히려 로마의 동맹도시들은 결속을 더 굳건히 유지했습니다.

당시 역사자료들을 보면, 도시 내부에서 평민들은 로마에 대해 악감정을 많이 가지고 한니발 편을 드는 분위기였다고 하는데, 도시의 지배층들이 로마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이었다고 합니다.

평민들 입장에서는 로마에 전쟁이 날 때마다 동맹시의 시민들을 강제로 징발해 갔는데, 정작 전쟁에서 이겨도 전리품은 로마시민과 동맹도시의 지배층에게만 배분되었기 때문에 로마에 쌓인 악감정이 많았는데, 지배층들 입장에서는 로마가 동맹도시의 내정에 일절 간섭하지 않았기에 로마에 굉장히 호의적이었으며, 한니발이 자신들에게 로마와 같은 정도의 자치권을 보장해 줄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결국, 칸나이 전투의 대승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데 실패하고 로마와 동맹도시들의 결속을 와해시키는 데 실패한 한니발은 계속되는 지연전술과 소모전에 병력이 깍여나가며 고전하다 패배, 자살로 생을 마감하죠. 결국, 한니발은 로마에 진게 아니라 로마 동맹의 굳건함에 패배한 겁니다.

이렇게 굳건했던 로마의 동맹도시들이 65년 후에는 반대로 로마에 반기를 들고 선전포고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동맹시 전쟁입니다. 그토록 굳건했던 로마의 동맹이 단순히 깨지는 걸 넘어 내전 상황까지 치닺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카르타고와의 전쟁 때에는 동맹시의 평민들과 시민들에게 불만이 쌓이는 정도였던 것이 로마가 패권국이 된 이후에는 동맹시의 귀족들에게조차 제대로 된 경제적 분배가 이뤄지지 않게 되었던 겁니다. 로마가 패권국이 되면서 값싼 노예를 활용한 대규모 농업을 통해 저가의 농산물이 쏟아져나오면서 자영농을 영위하던 로마시민들이 몰락하던 것과 똑같은 과정을 로마의 동맹도시들도 겪게 되었는데, 로마의 귀족들은 대규모 노예농업으로 돈을 벌었던 반면, 동맹 도시의 귀족들은 그럴 기회조차 없이 몰락해갔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나마 월급을 받고 군대에 지원하거나, 로마시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로마시민들과는 달리, 아무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동맹시의 시민들의 절망과 분노는 이들의 반란으로 자연스레 연결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결국, 로마 군대와 똑같은 편제와 전술체계로 무장된 동맹시의 군대와 로마의 군대끼리의 전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고, 반기를 들었던 동맹시들은 자신들의 잠정적인 국가 이름을 “이탈리아”라고 명명합니다. 이탈리아라는 명칭이 국가의 이름으로 명명된 최초의 사건이 바로 이 동맹시 전쟁의 반란 도시측에 의한 것이었다는 건 정말 아이러니합니다.

이렇게 치열하게 전개되던 동맹시들의 반란은 3년을 맹렬하게 지속되다 법령 하나에 순식간에 종식되는데, 동맹시의 시민들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주도록 법이 제정되자 반기를 들던 동맹시들이 명분을 잃고 대부분 로마에 다시 붙게 된겁니다. 동맹시의 시민들에게도 로마 시민권이 주어진다면, 로마시민들과 동등한 경제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며, 특히나 월급을 받고 군대에 지원할 수 있었던 거지요.

이렇게 로마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을 때에도 굳건히 동맹을 지켜나가던 도시들조차 경제적인 문제가 누적되면 누구보다 강력한 적이 되어 등에 칼을 찌를 수 있다는 게 역사가 주는 교훈이 아닌가 합니다. 이 교훈은 지금 이 시간 우리나라에서도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다 여기던 동맹들, 당연히 우리 편이라 생각했던 이들이 오히려 가장 위험한 적으로 돌변해서 맹렬히 우리를 공격하는 경우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돌변하는 태도들을 보며 배신자라 욕하기도 하고, 어찌 이렇게 될 수 있는지 어리둥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말 반성하고 돌아봐야 하는 건 그들이 아니라 우리들입니다. 그동안 그들의 입장과 상황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관찰하고, 그들의 어려운 입장에 공감해주며 관심을 가져주는 주의력과 공감력이 충분했었는지를 돌아봐야 하는거지요.

3년동안 치열한 동맹시 전쟁 동안 집정관이 전사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동맹시의 시민들과 로마의 평민들을 돌아보고 그들의 어려움에 공감해 정말 필요한 법령을 제정해서 전쟁을 끝내버린 영웅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주변의 어려운 사정을 돌아보고 관심 가져주며 공감할 줄 아는 이들이 리더십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그 나라에 미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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