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은 왕릉을 보좌하라

기원전195년,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병이 들어 사망하려 하자, 황후인 여씨가 당시 승상인 소하가 나이들어 죽게 되면 누구를 다음 승상으로 할지를 물었습니다.

“소하가 죽으면 조참을 승상으로 하고, 조참 다음에는 왕릉을 승상으로 하되 왕릉은 지혜가 모자라니 머리가 좋은 진평이 왕릉을 보좌하도록 하며, 승상은 아니더라도 가장 믿을 수 있는 신하인 주발을 중용하라”

별거 아닌 인사평이라 넘어갈 수 있지만, 여기에는 상당히 주도면밀한 유방의 복심이 숨겨져 있습니다.

소하는 원래 유방이 뜻을 세우고 패현에서 처음 거병했을 때 마을을 다스리던 관리였던 소하를 주군으로 삼고자 청했음에도 사양하고 유방을 주군으로 추대했으며 이후로도 그의 지원이 없었다면 여러차례 틀림없이 죽었을 정도로 신망과 충성도가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승상이 된 소하를 제외하고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조참, 왕릉, 그리고 주발 같은 승상 후보들은 모두 유방이 태어난 패현에서 함께 동고동락한 동향친구들입니다.

유방이 군사를 일으켜 지역의 군벌로 성장하고, 왕이 되어 항우와 경쟁하며 패업을 달성하는 동안에는 그러한 동향 친구의 신뢰보다 능력있는 신하가 절실했습니다. 그러한 유방의 심중을 읽었는지, 패현 출신의 신하들은 자신보다 유능한 이들이 어느날 갑자기 툭 튀어나와 자신들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서도 크게 내색하지 않았고, 자중했습니다. 소하가 조창보다 높은 관직에서 자신들을 지휘해도 승복했고, 소하가 천거한 한신이 난데 없이 굴러들어와서 대장군에 봉해졌어도 크게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유방 본인도 패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는 철저하게 몸을 낮추고 능력있는 신하를 중용했으며,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실천했습니다.

“대왕께서는 평소에 너무나도 오만무례하십니다. 이제 대장군을 임명한다고 분부를 내리셨으나, 앞으로 모든 병사를 다스릴 대장군을 대하는 태도가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하십니다. 이런 오만한 태도 때문에 한신 같은 호걸들이 대왕의 곁을 떠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대왕께서 한신을 대장군에 임명하시려거든, 반드시 길한 날을 잡아서 목욕재계(沐浴齋戒)하시고, 제단을 세우고 크게 예를 갖추어 식을 거행해야만 모두가 따를 것입니다.”

유방이 촉나라로 도망가는 길에 소하가 한신을 천거하는 것에 마지못해 듯도보도 못한 이를 대장군에 임명하겠다면서도 진지한 태도를 보이지 않자 이렇게 실랄한 직언을 듣고도 유방은 참았고, 그의 쓴소리를 경청했으며 들은 바를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그만큼 승리와 성과가 절박한 시기, 패업을 향해 달려가고 성장해가는 시기에 유방은 능력있는 신하를 중시했고, 그의 핵심 지지기반인 패현 인사들도 몸을 낮추었던 겁니다.

그러나, 패업이 완수되어 중국을 통일한 황제 유방에게 능력있는 신하란 후대를 위협하는 잠재적인 적이자 숙청대상, 그렇다고 명분없이 대놓고 숙청을 하면 조직의 기강이 불안정해지거나 도리어 그들끼리 손을 잡고 반격당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할 존재,,, 한마디로 “뜨거운 감자”가 된 겁니다.

입장을 바꿔서 이번엔 패현출신이 아니라 능력 때문에 영입된 신하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또 새로운 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한 주군의 심중을 헤가려 관직을 내려놓고 은퇴한 장량과 반대로 막강한 군권을 쥐고 휘두를 때부터 주군의 심기를 읽지 못하고 방자하게 행동하다 누명을 쓰고 처참하게 죽은 한신, 꾀가 많고 적절하게 처신해 끝까지 살아남았으나 최후의 최후까지 주군의 경계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감시당하던 진평, 주군의 심기를 모른 채 자신의 이상에 기반한 정치시스템을 제안했다 분노를 사 홀대받다 생을 마감한 역이기,,, 이들 모두 능력의 측면으로는 패현 출신의 고만고만한(?) 인재들을 압도하고도 남습니다.

그들이 멍청한 게 아닌데, 패현 출신 인사들에 대한 주군의 특별한 감정과 신뢰를 모를 리 없었을 것이고, 역사적으로 토사구팽의 사례들이 없었던 게 아닌데 그들은 왜 그렇게 무력하게 밀려날 수밖에 없었을까요? 물론, 천자라는 황제의 권력과 카리스마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켜 또다시 민중을 전란의 고통에 빠트리지 모했을거라는 명분론을 근거로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모두 “개인 플레이”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거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개개인의 차원에서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더라도, 결국에 승리하는 건 개인이 아니라 조직이고, 팀이자 동맹입니다. 패현 출신 인사들은 주군인 유방이 없었다면 그 자리까지 올라갈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단순히 힘을 합치고 단결하는 차원을 넘어서 패업이 진행되는 시기에 주군의 뜻을 받들어 자신보다 능력이 출중한 외부인사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고차원적인 행동패턴을 일치단결해서 보여줄 만큼 조직화 되었기 때문에 개개인의 집합에 불과한 외부출신 신하들의 개인능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들 패현 출신 인사들을 이기지 못하게 된겁니다.

결국, 서로의 입장차를 뛰어넘어 단결하고 조직적으로 사고하며 행동할 수 있는 조직능력이야 말로 개개인 차원의 능력을 압도하는 승리의 비결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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