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이 추진되기 위한 전제조건

아베의 집권 시절, 아베노믹스는 일본 내에서도 여러 논란이 있었습니다. 애초에 장기 저성장과 디플레이션을 인위적인 조치로 억지로 해결하겠다는 시도도 무리였지만, 아베의 세개의 화살이라는 조치(무제한 양적완화, 정부지출 확대, 파격적 기업규제 완화) 모두가 장기적으로 지속하기에는 부작용이 너무 커질 수 밖에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아베노믹스를 일본은 무려 10년을 넘게 지속해오고 있는겁니다.

이정도쯤 되면 아베노믹스가 정말 성공한게 맞는가를 따져보기 전에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엄청난 부작용을 양산하는 무리한 조치들을 어떻게 그리 성공적으로 실천해낼 수 있었는지가 궁금한 상황입니다. 선거로 국가권력이 교체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개혁이라는 걸 자그마치 10년 넘는 기간동안, 성과가 있는지 없는지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지속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 그 자체로도 엄청난 겁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온국민이 똘똘 뭉쳐 한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수반되는 고통을 참고 정진하는 국민성을 가졌기 때문에 10년 동안 자발적으로 고통을 감내했다면, 일본의 위상은 지금정도에 그치지 않았을겁니다. 아베노믹스가 10년 넘게 일관성을 가지고 추진될 수 있었던 원인은 특수한 상황적인 요소들에 기인한 바가 큽니다.

  1. 미국의 묵인
  2. 모든 게 파괴된 후의 절박함, 기득권의 저항 실종
  3. 다른 대안이 없었다.

아베노믹스는 필연적으로 장기간 엔화가치의 하락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됩니다. 이러한 엔저는 일본 기업들의 수출경쟁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으며, 실제 우리나라 수출기업들이 이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미국 입장에서는 엔저가 지속되면 경제적으로 피해를 입을수 밖에 없었는데도 지난 10년 내내 일본의 엔화절하에 대해 미국은 침묵했습니다. 한마디로 엔저를 미국이 용인해줬기 때문에 아베노믹스가 지속될 수 있었던 거지요.

미국 입장에서 아베노믹스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2011년 후쿠시마원전 폭발사고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일본의 위상과 경제를 그대로 방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이 당시의 추세대로 무너지고 쪼그라들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도 같이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보다 일본의 회복이 절실했던 게 미국이었다는 거지요.

이렇게 잃어버린 20년의 경제침체와 대미를 장식한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정말 절박했던 게 미국만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일본 국민들도 “이러다 일본이 후진국으로 추락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절박함에 휩싸여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만큼 잃어버린 20년이라는 버블붕괴 이후의 경제참상은 일본인들에게 참혹한 것이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떨쳐버리고 싶은” 상처였다는 건 당시 유행하던 문학작품이나 드라마, 영화등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아닌게, 우리가 겪었던 97년 외환위기 이후의 처참했던 상황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20년을 이어갔다고 상상해보세요.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절박해도 그나마 그럴듯한 대안과 해결책이 있었다면 아베노믹스라는 희대의 엽기적인 경제조작이 10년을 넘게 지치지 않고 지속될 수는 없었겠죠. 잃어버린 20년의 기간 동안 시도해볼 수 있는 것들은 다 닥치는대로 시도하고 실험해봐도 디플레이션이 해결이 안되는 막막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엽기적인 정책이 버젓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겁니다. 딱히 눈에 띄는 합리적인 대안, 그나 기업과 국민의 고통을 덜 강요하는 대안을 더이상 찾지 못하니 결국은 이거 말고는 할게 없는거지요.

이렇게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방해요소들과 내부의 저항을 극복하고 추진해내기 위해서는 개혁의 내용보다 이런 외부적인 요소들이 훨씬 더 중요한 관건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누군가의 자발적 양보와 타의적 희생을 전제하지 않는 개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개혁의 내용이나 방법론이 아무리 세련되고 훌륭하더라도 그렇지요. 때문에 개혁을 추진하고 성사시키려는 이들은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개혁을 추진하면서 어수룩하게 사람들에게 개혁 외에 다른 대안의 여지를 남겨두거나, 개혁의 대상이 느끼고 있는 절박함보다 더 큰 희생을 강요하거나, 개혁의 결과 피해를 보게 될 대상 중, 특히 개혁을 저지할 역량이 있는 이들을 설득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아무리 훌륭한 개혁이나 정책도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의 필요성이나, 이 개혁이 얼마나 좋은 결실을 가져올것인지를 열심히 장황하게 설명하다가, 개혁이 실패하면 그 실패를 방해세력의 탓으로 돌리며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무능을 끝까지 깨닫지 못하는(모르는 척 하는 것일수도) 이들을 동정하는 건 어리석은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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