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영상은 서구문명이 제시한 프레임에 비판 없이 휘둘려 인류가 많은 피해와 고통을 받았다 주장하는 수바드라 다스의 책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을 소개하는 영상입니다. 서구문명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강력한 브랜드이고, 여기에 거스를 수 있는 인류는 많지 않기에 잘못된 프레임조차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며 억압과 피해를 당한다는 주장은 매우 참신하며 그 자체로도 동의하는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는 주장입니다.
이 중에서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것은 다름아닌 “과학”일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학문체계만큼 객관적이고 쉽게 반론이 어려운 절대적인 권위를 만들어 활용하기 쉬운 프레임이기 때문입니다. 서구문명의 어두운 그늘이라 할 수 있는 우생학과 인종 다원설(모든 인류가 하나의 시조를 두었다는 사실 거부), 인종 간에 서열이 존재하고 인종 그 자체에 가치판단을 부여하는 만행을 과학이라는 프레임을 씌워서 진행했다는 비판을 우리 현대인이 듣게 된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과학이 결코 절대적이지 않고, 심지어 인류의 해악인 우생학에 동조하고 인류에 해악을 끼쳘으니 과학은 비판받아야 마땅할까요? 저는 이러한 지적을 하는 수바드라 다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봅시다. 과학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서양 문명이 제국주의로 발전하기 전에는 인종주의나 우생학이 맹위를 떨치지 않았다가, 과학이 서구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인종주의나 우생학이 맹위를 떨치기 되었다고 한다면 수바드라 다스의 주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을것입니다. 그런데, 과학과 과학의 토대인 합리주의가 발흥하기 이전에는 인종주의나 우생학이 존재하지 않았을까요?
근대과학과 합리적 이성이 출현하기 전 서구유럽 사회는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투르크의 약탈과 납치에 의해 수많은 유럽인들이 노예로 끌려가 노동과 매춘에 종사했었습니다. 애초에 자신들의 우월함을 과시할 수 없을만큼 절박한 위기상황이었지요. 그 전엔 몽고의 침입을 겨우막아내는 와중에 러시아 지역은 완전히 몽고의 지배 아래에 놓여있었구요. 정치적으로 인종적 우월성을 확인받고 싶어할만한 동기가 전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제국주의 성립 이전에는 정치적인 동기가 전혀 없었음에도 인류의 일원론, 즉 모든 인류는 하나라는 생각은 전혀 정착되지 않았으며, 제국주의 시절보다 훨씬 더 강경하고 공고한 인종차별주의가 횡행하고 있었습니다. 즉, 우생학적 정서나 인종차별주의는 과학의 산물이 아니라 야만의 산물이라는거지요. 중요한 건, 야만주의의 대척점은 특정한 정치적 지향점이 아니라 합리주의, 즉 과학적 사고방식이라는 사실입니다.
“과학”의 이름으로 인종차별주의나 우생학이라는 유사과학을 정당화시켰던 과거 제국주의의 풍조에서 비판받아야 하는 건 과학이라는 프레임이 아니라 군사적, 경제적으로 우월해진 유럽의 우월감이라는 정서적 토대여야 합니다. 그렇게 과학과 정서를 구분하고 따로 떼어서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근대 과학이 성립되기 이전 시대나, 아직 과학이 보편화되지 못했던 국가들에서 훨씬 더 지독하고 악독한 인종주의가 활개를 쳤다는 걸 잊어선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구 제국주의의 악행과 어두운 이면들을 돌여다보면서 진정 반성해야 하는 건 과학도, 과학이라는 이름의 프레임도 아닌 그저 제국주의 이전부터 계속 계승되어온 “야만주의”여야 합니다. 그런 야만성은 과학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나라들도, 과학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과거에도 인간의 추악한 기본 본성 중 하나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수바드라 다스 또한 이를 무시하면 안됩니다. 야만성이라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본질을 주목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서구사회 비판”이라는 프레임을 끌어오고, “과학의 부작용”라는 프레임을 끌어와서 본질을 왜곡한다면, 이 또한 잘못된 시도가 될 수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