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용 교수의 불교관련 강의입니다. 사실, 불교 강의가 아닌 불교관련 강의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있는데, 독실한 불교 신자분들 중에서는 오히려 이런 강의를 불편해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불편한 부분에서 대표적인 게 제목과 같은 데바닷타와 아나트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데바닷타는 붓다를 배반하고 승단을 분열시키려 한 인물로 대부분의 불교 전통에서는 이 사람을 능가하는 악인도 없고, 전생부터 후생에 이르기까지 온갖 나쁜 이야기들로 가득찬 설화들이 나옵니다. 한마디로 기독교의 적그리스도 내지 거짓 선지자에 해당하는 인물이지요. 하지만, 초기 불교 구전에서 데바닷타는 단지 “보수적인 태도”로 붓다에 반기를 들었다는 정도의 기술로 그친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신선한 주제나 흥미있는 이야기거리로 그칠 이야기가 아닙니다.
데바닷타가 주장했다고 알려진 내용들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기존의 고행전통이 깨달음에 실제적으로 효용이 있고 장점도 많다는겁니다. 그런데, 고행도 깨달음을 위해 장점이 있다는 주장은 데바닷타 만의 주장이 아닙니다. 붓다도 같은 주장을 했으며, 고행을 통한 깨달음을 부정하거나, 열등한 방법론이라 공격한 적도 없습니다.
영상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지만, 데바닷타가 갈라서서 이끌었던 무리는 데바닷타가 죽은 후에 사라진 게 아닙니다. 중국의 현장법사가 천축국을 방문하던 시절까지도 데바닷타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파가 남아있었다고 하며, 영상에서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하나의 사원 안에서 함께 거주하며 정진했었다는 기록처럼 데바닷타를 따르던 종파들도 다른 불교종파들과 함께 하나의 절에서 함께 머무르며 생활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하게 된다면 붓다의 가르침이라 알려진 내용들이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인 가르침이라 숭상하면서 이에 집착하고, 그러한 절대성에 기반해서 많은 일들을 풀어나가려는 욕구에 커다란 경종을 울리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아나트만, 즉 무아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의 조계종과 같은 주류 불교종파에서 아나트만, 즉 무아(無我)는불교의 가르침들 중에 가장 중요한 핵심 중 하나라고 가르치고는 합니다. 또한 이 아나트만이야말로 당시 인도사회의 주류로 등극했던 힌두철학과 불교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점이라 말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실제 붓다가 직접 말한 가르침들을 전하고 있는 구전에서는 무아, 즉 아나트만에 대해 강조하는 내용이 전혀 없으며 실제로 아나트만을 언급하는 구절마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붓다가 무아, 즉 아나트만이라는 개념을 직접 말한 적이 없으며, 어디까지나 집착을 벗어내다 보면 마지막에 남는 것이 “나(아트만)라는 것에 대한 집착”이니 이것도 벗어내라는 가르침을 말한 것이지 나 자체를 부정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아트만에 대한 집착이아닌 아트만 자체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아나트만”을 말하고 설법하기 시작한 건 오히려 후대에 힌두교 철학이 집대성되어 나온 “우파니샤드” 가 보급된 이후의 시점이라고 하네요.
결국 붓다는 아나트만을 깨달아서 우리에게 전해주려던 게 아닐 수 있다는 겁니다. 아트만에 대한 집착도 벗어던지라는 말과 아트만이 없다는 말이 같은 뜻이 아니며, 아트만이 없다는 말이 아나트만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가 될 수 없으니 애초에 붓다의 가르침에서 지금의 불교는 어디까지 벗어나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성용교수의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작금의 한국불교가 원래의 붓다의 가르침에서 얼마나 벗어나있는가” 따위가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받아들이며 다르게 행동하는 모든 차이를 다름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옳고 그름으로 받아들이고 서로 공격하며 독단에 휩싸이면 안된다. 바로 그 가르침이야말로 붓다가 직접 강조한 중요한 가르침들 중 하나라는 걸 잊으면 안된다는 게 강의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생각이 독단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와닿습니다. 또한 독단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에 대해서 강성용교수는 “나도 틀릴 수 있고, 내 한계가 있을 수 있고, 다른 가능성이 있으며, 더 심하게는 내가 알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말이 깊게 와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