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포비아의 본질은 “책임 지우기”에 있습니다.

전기차가 불이 날 확률이 적다, 내연기관 자동차에 비해 안전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통계를 들이밀고 이야기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전기차의 기술수준이나 안전성이 아니거든요.

왜 이게 본질이 아니냐는걸 확신하냐면 중국처럼 전기차가 많이 돌아다니고 있는 나라에서 전기차가 불이 났는데 우리나라처럼 전기차 포비아가 생겼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아요. 문제의 본질은 전기차가 아니라 화재사고가 일어났을 때 2차적인 피해를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가 아직 확실하지 않다는 겁니다.

지하주차장에서 전기차가 아닌 일반 내연기관차량 화재가 났는데, 거기에서 불이 옮겨붙어서 주차장 내의 차들이 다 불이 탔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그 피해보상을 차주 또는 차주측 보험사가 감당해야 하나요? 그러지 않지요. 차량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면 일부 배상책임이 있다는 판례가 있지만, 상식적으로 볼 때 큰 하자가 없이 정상적인 운용을 했다면 차주측 책임은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애꿎게 불난 차량의 근처에 있다 불이 옮겨붙은 피해차량 차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차보험을 들어놓아다면 별다른 문제 없이 보험회사에서 피해보상을 해줍니다. 굳이 불이 난 차량의 제조사나 차주 또는 차주의 보험사에게 배상하라며 소송을 하거나 몇 년 씩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화재 차 차주나 제조사가 어느정도의 귀책사유가 있고, 또 그런 특별한 정황이 없다면 아무런 귀책사유가 없다,,, 이런 이런게 꾸준한 판례가 쌓이면서 정립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전기차는 어떤 경우에는 누가 책임을 지고, 어떤 경우에는 책임이 인정되고 하는 판례를 비롯한 사회적 합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란 말이죠. 여기서 자칫 차주측의 명확한 귀책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라도 책임이 지워지는 쪽으로 판례가 나와버리면 그 다음부턴 그런 불상사가 일어날 가능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전기차를 몰려고 할 것이며, 어떤 보험사가 자칫하면 수십억원에 달하는 보상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데 전기차 보험상품을 팔겠습니까?

아직 정해진 게 없으니 사람들이 두려워하는겁니다. 전기차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책임”을 “덤터기”쓸지도 모르는 상황이 두려운거에요. 그러니 쉽게 전기차를 살 수도 없고, 우리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전기차가 주차되는 걸 용납하기 어려운 겁니다. 자기 자신이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도 사고가 난 책임을 일부라도 져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면 누구라도 두려워하는게 당연합니다.

요즘 응급실 뺑뺑이로 난리가 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명백한 자신의 과실이 아닌 상황에서 의료사고가 났는데 책임을 져야 한다며 돈을 내라거나 감옥에 가라는 판결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 그런 상황에서 내 잘못이 아닌 상황에서도 감옥갈 리스크를 감당하면서 진료를 하고 싶겠어요? 의대 정원을 5천명 더 늘려도 응급의학과 지원할 사람이 나오긴 어려울겁니다.

결국, 전기차도 기존의 내연기관차 처럼 사고 발생 시 책임소재에 대해 합리적으로 정리가 되면 이런 전기차 포비아는 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번 벤츠 전기차 보상문제가 합리적으로 잘 정리되고 나면 이런 소란은 금방 잠잠해질겁니다. 물론, 그 “금방”이라는 게 며칠이나 몇달을 의미하는 건 아니니까 문제이긴 할테지만요.

“사고가 터져서 막대한 피해가 났고, 많은 피해자가 있는데 왜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느냐!”

지금까지 신문 사회면을 채우던 분노에 찬 목소리들 중 하나가 이런 목소리였습니다. 하지만, 명백하게 누군가에게 귀책사유를 적용할 수 있는 근거나 당위성이 없는 사건에서는 결국 누구도 책임을 지울 수 없어 그 피해를 사회 전체 또는 보험회사나 재보험회사가 지게 되는 경우도 굉장히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번 사안이 어떻게 사획적인 합의를 이루게 될 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과정이 정당하고 합리적인 과정이어야 하며, 객관적인 근거에 기반해서 논의가 이뤄져야 합니다. 그런 과정의 정당성이 빠른 처리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밀려 무시되다가 난데없이 자질 없는 판사들의 개념없는 판결들 몇 개에 사회 전체가 아사리판이 나고 소란스러워지는 일들을 우리는 자주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이번 사안을 보면서 안타깝고 우려하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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