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대로 믿을 권리는 존재하는가

어떤 광신자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무엇을 믿 어야 하는지를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말하는 거죠?” 이 물음은 한 믿음에 대한 보증이 누군가의 권위에 달려 있음을 암시한다는 점 에서 잘못된 도전이다. 이는 실재의 역할을 무시하는 처사다. 무언가를 믿는다는 행위는 철학자들이 ‘마음에서 세계로 향하는 적합성의 방향’이라는 속성을 갖는다. 우리의 믿음은 실제 세계를 반영하기 위한 것으로 바로 이 지점에서 믿음이 잘못될 수 있다.

무책임한 믿음, 더 정확하게는 무책임한 방식으로 습득되고 유지되는 믿음이 있다. 그와 같은 방식에 대표적으로 증거 무시하기, 의심스러운 출처의 가십이나 소문, 목격담 받아들이기, 다른 믿음과 비일관성 무시하기, 희망적 사고 포용하기, 음모론 선호하기가 있다.

“증거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언가를 믿는 건 언제, 어디 서, 누구든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 19세기의 수학철학자 윌리엄 클리퍼드(Wiliam Clifford)의 엄격한 증거주의로 돌아가자는 건 아니 다. 클리퍼드는 (증거가 아닌) 희망적 사고, 맹목적인 믿음이나 감정 이 믿음을 자극하거나 정당화하는 무책임한 ‘과잉 믿음’을 막고자 애썼다. 하지만 이는 너무 엄격하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탐구한 제임스는 ‘믿을 권리’가 종교적 관용의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핵심 믿음(교리)그 자체로 자신을 정의하는 이런 종교들은 비신자들에 대한 억압과 고문, 수많은 전쟁을 벌여왔으며, 이는 쌍방의 ‘믿을 권리’를 인정해야만 멈출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에서도 극단적으로 편 협한 믿음은 용납할 수 없다. 권리에는 한계가 있고 책임이 따른다.

안타깝게도 믿을 권리를 과도하게 행사 하면서 책임은 회피하는 사람이 오늘날 많아 보인다. 통상 ‘나는 내 믿음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주장으로 방어하는 고집스러운 무지와 거짓 지식은 종교적 관용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달 착륙이나 샌디훅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 정부가 꾸며낸 각본이고, 오바마가 무슬림이고, 지구가 평평하고, 기후 변화가 사기라고 믿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이 경우 믿을 권리는 부정적 권리로 선포된다.

다시 말해 다른 이와의 대화를 막고 모든 비판을 회피하여 자신의 신념에 대한 헌신을 타경우 믿을 권리는 부정적 권리로 선포된다. 다시 말해 다른 이와의 대화를 막고 모든 비판을 회피하여 자신의 신념에 대한 헌신을 타인이 방해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들의 마음은 배움에 열려 있지 않고 닫혀 있다. 그들은 ‘진정한 신자’일지 몰라도 진리를 믿 는 사람이 아니다.

의지와 같이 믿음은 자유의 궁극적 기반인 자율성의 핵심으로 보인다. 그러나 클리퍼드도 말했듯 “한 사람의 믿음은 어떤 경우에 도 오직 그 자신하고만 관련된 사적 문제일 수 없다.” 믿음은 태도와 동기를 형성하고 선택과 행동을 유도한다. 믿음과 앎은 인식론적 공동체에서 형성되며, 공동체 또한 그 영향을 받는다. 믿음의 습득, 유지, 포기에 대한 믿음의 윤리가 존재한다.

그 윤리는 우리의 믿을 권리를 산출하고 제한하기도 한다. 거짓이고, 도덕적으로 혐오스럽고, 무책임한 믿음이 있듯, 위험한 믿음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믿음들을 믿을 권리가 없다. 


잡지 “코리아 스캡틱” 39호에 개제된 대니얼 더니컬라의 컬럼에 실려있는 내용을 제 임의로 읽기 쉽게 첨삭하고 고쳐쓴 글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라는 신념체계만(특히 내가 믿지 않거나 내가 싫어하는 종교) 사회적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사획적 통제를 받아야 할 당위가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책임감이 요구되는 믿음이라는 건 종교 뿐 아니라 훨씬 광범위하고 다양한 오해와 편견들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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