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에 선지자 요나에 대한 기사를 다루는 요나서가 있습니다. 요나서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아무래도 동화 피노키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던 고래 뱃속에 삼켜진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잘 알려져있죠. 선지자 요나는 왜 고래 뱃속에 삼켜지는 벌을 받게 되었을까요?
선지자 요나가 활동한 시기는 북이스라엘이 영토를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던 전성기 시절이었습니다. 성경에도 그러한 전후사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요. 이것이 의미하는 건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침략해서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전으로,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앗수르의 수도)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당시에는 요나 선지자가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게 될 것을 선지자로서 알고 있었는지, 그러지 않았는지 알수 없으나,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 명령이 내키지 않는건 당연합니다.
수십년 넘게 이스라엘을 속국으로 삼아 압박하고 조공을 바치라 요구하던 앗수르에 가서 회개하라 선포할 때에 앗수르가 회개한다면 그건 앗수르의 통치에 신음하던 이스라엘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간 건 인간적인 감정으로 본다면 100% 이해하고 납득할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도망갔다가 결국 걸려서(?) 바다에 빠져 고래 뱃속에 들어갔던 거지요. 요나서 이야기의 끝은 니느웨에서 앗수르 사람들이 마음을 돌려 회개함으로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고 앗수르를 벌하지 않았다는 걸로 끝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요나에게 전하라 명하신 예언의 내용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멸망한다”였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니느웨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일시적이고 형식적인 회개에 불과했지만, 니느웨 왕이 칙령으로 모든 니느웨 사람들은 금식하고 하나님을 부르짖으라 명했기 때문에 그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십니다.
이건 신학적으로 엄청나고 거대한 담론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인간의 삶의 반응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그에 따라 시시각각 유동적으로 변하는 것이지, 결코 확정된 것이나 예정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개신교가 신앙의 가장 근간으로 삼는 것은 복음주의입니다. 보통명사로서 복음주의라는 것은 개신교 전체와 심지어 천주교의 일부까지도 아우르는 넓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미국 내 복음주의 교회(Evangelical church)는 주류 개신교교회(main line protestant church)에 반대되는 좁은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런 협의의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적인 성향을 띄게 될 수 밖에 없는데, 그러한 근본주의적인 성향에 경도될 때 특히 성경무오설과 함께 예정설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지기 쉽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정신을 긍정하는 건 모든 개신교에서 부정할 수 없는 근본적인 정신이지만, 그러한 생각이 계속 확장을 거듭하다 보면, 구원을 얻게 되는 데 필요한 과정인 믿음에 이르는 모든 과정들에 인간의 공로는 전혀 인정되지 않으며, 그러한 모든 과정들까지 하나님이 예비하고 예정하셨다는 논리를 내세우기 위해 이에 맞지 않은 근거는 배척하고, 오직 합치되는 근거들만을 모으기 시작하게 되는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짜맞춰진 근거들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경직된 성경해석을 유도하려다 보니 문자적으로 성경이 오류가 없다는 성경무오설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우리 잘못을 회개하는 데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양심”과 “자유의지” 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 이상의 것이 구태여 필요하다고 상정해야 할 동기가 있다는 주장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양심 이상의 어떤 운명론적인 안배나 장막 뒤에서 움직이는 교묘한 설계같은 것을 하나님이 우리 몰래 설치해 두셨으며, 그러한 설계와 예정에 포함되지 않은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구원의 여지는 존재할 수 없다는 식의 신학적 주장을 어떤 식으로든 강변하려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정론을 무리하게 적용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의 성경해석이라는 게 언제든 수정의 여지가 존재한다고 인정한다면 그들의 주장은 결코 한 순간도 유지될 수 없는 무리한 해석이 되버리기에 결국 자신들의 성경해석이 절대적으로 옳아야 하게 됩니다. 또 그 근거가 되는 성경구절들도 오류 없는 무오한 것이 되어야만 자신들의 주장이 유지될 수 있기에, 언제나 성경무오설과 예정설은 마치 한 쌍의 커플링처럼 함께 다니며 서로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복음주의 교단이 이런 성향들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건 이렇게 구조적인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나서 전체를 읽고 거기에서 직접적으로 밝혀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간을 소중히 여기시며 그의 예언의 말씀까지도 인간의 결단과 회개를 통해 돌이키시는 장면을 성경에 써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목격한다면, 특정한 신학적 사상을 절대적으로 고집하거나 무조건 의심치 말고 받아들이라는 식으로 교육하는 것에 대해 비판 없이 추종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요나서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어하시는 소통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