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다움의 근원

춘추좌씨전 선공15년 조(기원전594년)

노나라 선공 15년 봄에 공손귀부(노나라 왕족)는 초자(초나라 사람)와 송나라에서 합하였다. 송나라 사람들은 악영제를 사자로 보내어 진나라에 위급함을 고하게 하였다. 진나라 제후가 송나라를 구원하려고 하자 대부 백종은

“안됩니다. 옛 사람의 말에 아무리 채찍이 길어도 말의 배를 때려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은 바야흐로 초나라를 도와주고 있으므로 아직 초나라와 다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진나라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여도 하늘을 거스를 수가 있겠습니까. 속담에도 높이는 것이나 낮추는 것이나 마음에 달려있다고 하였습니다.”

“개울이나 연못은 더러운 물도 받아들이고 산이나 숲은 독충을 감추며 아름다운 구슬에도 티가 있는 법. 군대가 한때의 수치를 참는 것도 하늘의 도에 맞는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잠깐 기다리십시오.”

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유교에서 말하는 하늘은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 말하는 하늘과 개념이 다릅니다. 중용에는 하늘이 어떤 개념인지에 대해 규정하고 있습니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하늘이 밝히고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은 도(道)라 이르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여기서 성은 하늘, 도는 땅, 교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는 하늘을 절대적인 권위나 모든 것을 초월하는 상위의 개념으로 상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사람과 하늘이 소통하는 것은 극소수의 선택받은 이들을 제외하면 불가능 이전에 권위적으로 부정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교에서의 하늘은 우리가 마땅이 따르고 배워서 우리의 삶 속에 깃들어야 하는 중요한 교재이자 참고서로 여깁니다. 하늘이 인간에게 어떠한 성품이 되기를 바라며 어떻게 살아가기를 명하였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특정한 권위자의 주장이나 교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대부 백종이 논하고 있듯 세상을 살며 이해하고 경험한 작은 이치들을 기억하고 공부하며 궁리하는 것을 통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유교에서 말하는 하늘의 성품을 알 수 있는겁니다.

즉, 유교에서 말하는 하늘은 우리가 살면서 관찰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자연현상이나 사람 사는 일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연현상들과 삶의 지혜들에서 출발하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늘이 인간에게 밝히 알려주는 “인간다움”에 대해 알아갈 수 있다는 것이 유교의 가르침입니다.

하늘이라는 개념에 어떤 절대성을 기대하고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격을 상상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더러운 물이 섞인 개울이 하늘에 빗대어 논해질 수 있으며, 독충을 감춘 숲과 흠결이 생긴 불완전한 옥을 운운하며 “형세에 따라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바꾸라”는 백종의 주장이 어찌 감히 “하늘”을 운운하며 말할 수 있는지 납득하지 못하거나 의심하며, 때로는 크게 화를 내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사람다움”을 고민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사람다움의 표상은 하늘과 신의 징표나 말씀으로 시작해서 하계에 있는 사람으로 “하달(下達)”되는 인간상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절대신을 믿고 신앙하는 신앙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원칙이라 생각합니다.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 중 선택된 믿는 자들에 구체적인 말씀과 율법으로 명하시는 계율들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순종하고 실천함이 마땅하나, 그러한 신앙인 조차도 “사람다움”이라는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또 고민한다면 그 출발점은 신앙이이나 경전이 아닌 우리가 살면서 접하는 모든 현상과 삶 자체를 관찰하고 고민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에 목숨을 걸 정도로 열성적인 신앙인들 중에서도 전혀 사람다움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역사상 수도 없이 많았던 과거 역사를 돌이켜본다면 이러한 생각을 그저 신앙을 부정하는 이들의 망발로 단정하고 무시하기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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