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장자는 강에서 홀로 작은 배를 타고 명상에 잠겨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배가 장자의 배에 퉁 하고 부딪히는게 아닌가?
장자는 순간 몹시 화가 났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 나를 방해하는지 보려고 눈을 떴다.
하지만 부딪힌 배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그저 강물을 따라 떠내려온 빈 배였던 것이다.
장자는 곧바로 화가 가라앉으며 무언가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상황 자체에 화가 났다기 보다는 책임을 묻고 화를 낼 사람이 필요했던 거구나”
실제로 장자가 저 일을 겪은 건 아니고, 장자 제 20편 산목에 나오는 허주(빈 배)에 나오는 이야기를 유투버가 임의로 각색한 것입니다.
노나라 임금이 말했다.
“나는 옛 훌륭한 임금들의 치도를 배웠고, 선대 임금들의 유업을 닦았습니다. 나는 귀신을 공경하고, 현명한 사람들을 존중하며 그들과 친근히 지내면서도 선왕지도를 실천하고 잠시도 멈추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환란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요가 말했다.
“임금님의 걱정을 없애는 방법은 깊지 못하십니다. 살찐 여우와 아름다운 무늬의 표범이 산림 속에 살면서 바위굴에 숨어 있는 것은 고요함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밤에는 움직이고 낮에는 굴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은 경계하기 위한 것입니다. 비록 배고프고 목마르며 곤궁한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먼 강과 호숫가로 가서 먹이를 구하는 것은 안정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그물과 덫의 걱정을 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가죽이 재난의 원인 되는 것입니다. 지금 임금님께 있어서 노나라는 그 가죽과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임금님께서는 육체를 잘라내고 가죽을 벗어버리며 마음을 씻어내고 욕망을 없애버리고서 아무도 없는 들판에 노닐도록 하십시오. ,,,,,, 바라건대 임금께서도 나라를 떠나고 속된 일을 버리시며 자연의 도와 어울리시며 그곳(자연의 도를 실천하는 이상향)에 가십시오”
노나라 제후가 말했다.
“그 곳에 가는 길은 아득히 멀고 아무도 없는데 나는 누구와 이웃을 삼고 지낸단 말입니까? 내게는 먹을 것도 없고 양식도 없는데 어떻게 그 곳에 갈 수 있겠습니까?”
의요가 말했다.
“임금의 비용을 적게 하시고 임금의 욕망을 줄이시면 비록 양식이 없다 하더라도 풍족하게 됩니다. ,,,,,,,, 사람을 다스리는 사람은 재난이 있게 되고, 사람들에게 보호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근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임금은 사람을 다스리지 않았고, 사람들의 보호도 받지 않았었습니다. 바라건대 임금께서는 스스로의 재난을 제거하고 근심을 없애고서 홀로 도와 더불어 크게 광막한 나라에서 노니십시오.
배를 나란히 하고 황하를 건널 때 만약 빈 배가 와서 자기 배에 부딪힌다면 비록 마음이 좁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성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그 배에 타고 있다면 소리쳐 배를 다른 곳으로 저어가라고 할 것입니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칠 것이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치면서 반드시 나쁜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앞에서는 성내지 않다가 지금은 성내고 소리치는 것은 앞의 배는 빈 배였는데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텅 비우고 세상을 노닌다면 그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습니까?”
장자에 실려있는 원문의 취지를 생각해본다면, “빈 배”라는 것은 내가 욕망과 집착을 품지 않고 사람을 임의대로 하거나,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바라며 강요하지 않는 자연의 도를 완벽하게 실천한 상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화내거나 원망할 이유가 없을 것이며, 결국 나를 해칠 수 없을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사람들이 화를 내는 진짜 이유는 다름아닌 나 자신의 집착과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화를 내는 사람의 입장에서 무언가를 깨달으라는 말이 아니라, 다른 이가 화를 내고 나를 해하게 할만한 것들을 “자연의 도”를 실천함을 통해 피하고 제거하라는 겁니다.
“자기를 텅 비우고 세상을 노닌다면 그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의 이 한 문장이 나를 고심에 빠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