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의 비십이자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신신야, 의의역신야(信信信也, 疑疑亦信也)” 이 말이 나오는 구문을 옮겨보면 대략 이렇습니다.
믿을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며, 의심할 것을 의심함도 믿음이다.
현명함을 받드는 것이 어짊이며, 어리석음을 천시하는 것도 어짊이다.
마땅하게 말하는 것도 지혜이며 마땅하게 침묵하는 것도 지혜이니 침묵을 아는 것은 말할 줄 아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말이 많아도 모두 예의 통류에 합치하면 성인이고 말이 적어도 예법에 맞으면 군자이다.
믿으면 안되는 것을 믿는 것을 과연 믿음이라 할 수 있을까, 자의든 타의든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정황에서 그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과연 믿음을 보여주는 것인가 생각해본다면 무엇이 진정한 예의이고 올바른 행동인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것입니다.
조직 안에서 의심받고 있는 이가 있는데, 이를 방치하면서 “믿음”이라 착각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의심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본의가 아닐 지언정 사람들이 의심할만한 일이 벌어졌는데도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함정에 몰아넣고 배신할 때 까지 감시하며 기다리고 있다”라고 생각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설령 그런 생각이 확신 단계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합당한 의심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불안감은 점점 커질 수 밖에 없으며 이는 매우 파괴적인 돌발행동이나 좋지 않은 결말을 초래할 수도 있는겁니다.
그러니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나 의심을 받는 당사자 모두가 의심을 거둘 수 있으려며 구체적으로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에 우리가 너르 의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여주고, 그 의심을 해소하며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과정을 거치게 함으로서 상호간에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적의 이간계나 악한 자들의 중상모략에 의해 무고한 이가 적이 아닌 아군에 의해 희생당하는 비극이 일어나는 이유 또한 마땅히 의심해야 할 것을 의심하고, 이를 드러내더라도 아무런 앙금이 남지 않을 만큼의 상호간 신뢰와 공정한 절차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심해야할 것을 의심하지 못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일 수 없는 경우는 또 있습니다. 상사나 권위있는 자가 무조건적이고 무비판적인 신뢰, 즉 맹신을 강요하고,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그러한 맹신이 진실로 믿음과 비슷하기라도 한 것일까요? 이는 사람의 믿음을 농락하는 행위이며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범죄일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러한 조직에는 어떠한 믿음이나 신뢰도 뿌리내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믿을 것을 잘 구별해 믿는 것, 의심해야 할 것을 의심하는 것을 하나로 어우러야만 그것을 진정한 믿음으로 부를 수 있으며, 현명함을 잘 구별해 받들며 어리석음을 잘 구분해 배격하는 것이 진정한 어짊인 것과 같이 올바른 상식과 공정한 분별력에 기초하여 따라야 할 가치와 배격해야 할 가치를 한 데 아울러 합쳐지는 것이 바로 “통류(通流)”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