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악징선(勸惡懲善)장르에 대한 생각

일본 라이트노벨 중에 오버로드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인기도 상당해서 만화와 애니메이션까지 나온 작품인데, 줄거리가 뭐냐면 특별한 재능이나 교양, 그리고 능력도 없는 주인공이 그저 게임에만 푹 빠져 살다, 좋아하던 게임 서버가 종료될 때 기이한 인연으로 이세계로 전송됩니다. 그것도 게임할 때의 캐릭터와 길드 NPC, 아이템들을 다 가지고,,,

주인공에게 소중한 건 오직 자기가 애지중지 키웠던 길드와 길드내 NPC 뿐인데, 악명 높은 길드여서 전송된 이세계에서 온갖 악행과 잔학행위로 그 세계를 유린하는 과정이 전체 줄거리입니다. 주인공은 제대로 된 품성이나 교양도 없고 기본적인 인간성마저 결여된 채 모든 나라들을 유린하고 병탄하거나 흡수하며, 그나마 운이 좋으면 식민지로 전락합니다.

그런데, 워낙 압도적인 힘과 기술력 격차 때문에 이세계는 선악을 따지지 않고 제대로 된 반항도 없이 유린당하죠. 주인공과 주인공이 부리는 NPC들은 어떤 잔학행위와 악행을 해도 심판받기는 커녕 오히려 경외의 존재로 칭송받습니다.

그나마 정의로운 용사나 최소한의 인간성을 버리지 않는 선한 이들은 어린애들처럼 철저히 속아서 오히려 주인공을 정의로운 동료로 착각하거나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만한 권위와 정의로움을 갖춘 패자로 떠받드는 코미디를 연출하며 농락당합니다. 심지어는 주인공이 이걸 의도하지 않았어도 우연과 착각이 겹쳐 그렇게 되기도 하구요.

그야말로 악이 선을 통쾌하게 이기고 유린하는 권악징선의 스토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권악징선의 어처구니 없는 스토리가 오버로드라는 작품 하나 뿐이어도 놀라운데, 이런 식의 스토리로 독자들에게 신선함과 말초적인 자극을 주는 작품들이 생각보다 널리 퍼져서 거의 하나의 장르를 형성하고 있더군요. 우리나라도 결코 예외라 할 수 없고, 오히려 너무 노골적고 원색적인 권악징선 메시지 때문에 토가 나올 정도로 역겨움을 느끼는 작품들이 버젓이 올라오는걸 목격하고 놀랐습니다.

최근 네이버 소설(시리즈)을 보다 돈이 너무 많이 나가서 정액제인 노벨피아를 구독하던 중 접한 소설인데, 원래 19금이라 선정적인 건 당연하겠지만, 스토리가 너무 나간게 아닌가 싶더군요. 주인공이 처음엔 단순한 색정광에 세뇌 스킬을 통해 여자들을 자신만 사랑하고 충성하는 시녀로 만드는 것 까지야 뭐 선정적인 이벤트를 연출하기 위한 장치라 여길 수 있지만, 가면 갈수록 주인공 뿐 이나라 주인공이 세뇌시킨 여자들까지 기본적인 인간성을 포기하고 그들만의 욕망만을 추종하면서 결국엔 인류조차 멸절시키는 과정에 아무도 제대로 된 저항을 못하고, 그러한 인류의 패배에 어떠한 안타까움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미녀를 세뇌시켜 절대충성하게 만들고, 세계의 모든 국가와 인류를 압도하는 강력한 힘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이 어떤 악행을 저질러도 칭찬받고 지지받다보니, 결국엔 주인공과 세뇌된 여자들만 타락하는게 아니라 애국심과 공리주의 철학으로 스스로를 희생하는 나름 정의로운 인물까지도 세뇌도 없이 타락시켜 대한민국 국민을 절멸시켜 자원으로 치환하는걸 거리끼지 않는 존재로 타락시키며 결말을 그려나갑니다.

이러한 권악징선의 스토리를 좋아하는 독자들은 왜 이런 기괴한 스토리에 열광하는 걸까요? 아마도 현실세계를 지배하는 질서에 대해 염증이나 절망감을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위선이나 기만에 의해 불이익을 받거나 적응하지 못하고 고립감을 느끼거나, “인내”, “겸손”, “배려”, “희생”과 같은 품성을 강요받는 것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다면 그러한 짜증을 한칼에 베어내는 권악징선의 악당이 자신에게 주어진 힘이나 권력, 또는 시스템 상의 치트능력을 통해 원없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모습이 어쩌면 역설적으로 더 통쾌하고 그럴듯한 당위성을 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겁니다.

기존의 도덕이나 질서, 또는 시스템을 유린해도 피해자들(그들이 선하든 악하든 상관없이)이 찍소리 내지 못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힘과 권력이 주는 뒤틀린 카타르시스 또는 대리만족이 그러한 권악징선의 문학이 계속해서 양산되며 확산되게 만드는 걸지도 모르죠. 기존의 가치와 도덕, 그리고 기존 사회시스템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권악징선의 스토리를 기존 질서를 전복시킬 만큼의 압도적인 힘과 통쾌함이라는 하나의 판타지 내지는 대리만족의 소재로 활용하고 있는것 같다는거지요.

하지만, 이런 작품을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느껴보거나, 이런 기절초풍할만한 파격적인(?) 강자의 자유분방한(?) 모험기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건 정말 위험한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돌아갈 수 없고, 오히려 이들이 어려워하는 “인내”, “겸손”, “배려”, “희생”을 끊임없이 실천하는 이들이 인생에서 의미와 결실을 찾아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어중간한 강자와 대다수의 약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중간한 강자는 대다수의 약자를 오직 힘이나 특수한 능력같은 것만으로 압도할 수 없습니다. 역사상 그게 가능했던 적은 정말 몇차례 없었죠. 징기스칸이 전세계를 휩쓸었거나, 유럽 열강이 신대륙을 유린했던 경우같은 극히 일부의 경우가 그런 경우였었죠.

때문에 이런 식의 권악징선의 스토리에서 무언가 긍정적인 걸 느끼거나 끌어내면서 자꾸 이러한 스토리에 탐닉하는 건 읽는 이에게 점점 현실의 적응력을 깍아먹게 만들 수 있기에 정말 조심해야 하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하기사, 말초적인 자극을 위해서는 인륜을 저버리는 애정행각이나, 고어한 잔혹행위까지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만화나 문학작품들까지 넘쳐나는 게 요즘 세상이니 이거 하나만 가지고 걱정하고 경고하는게 뭐 얼마나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만, 제 개인적으로 이런 작품들을 보다 느끼는 혐오감과 두려움과는 별개로 정말 경각심 없이 점점 더 탐닉하다 피해를 보게 되는 분들이 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걱정이 되어 잔소리 가득한 글을 올려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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