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은 “나”라는 글자를 너무 고지식하게 인식한다.
그 때문에 가지가지의 기호와 가지가지의 번뇌가 많아진다.
도연명은 말하기를
“내가 있는 줄도 모르겠거는 사물이 귀한 줄을 어찌 알리오?”라 했고
조형은 또 말하기를
“이 몸이 내가 아닌 줄 안다면 번뇌가 어떻게 침범하리오?”라고 했다.
참으로 정곡을 찌른 말이다.
채근담 후집 56칙
채근담 후집 56칙의 내용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anatman)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아론을 설명하고 있는 두 인물은 도연명과 조형으로 둘 모두 승려가 아닙니다. 도연명은 관료이자 귀거래사로 유명한 위대한 시인이며, 조형 또한 북송 시대의 관료이자 도원집, 한림집, 그리고 법장금쇄록 같은 저서를 남긴 학자입니다.
이는 “무아”라는 개념을 단지 불교나 불교철학의 한 범주로 국한하지 않고 삶을 살아가는 통찰과 지혜의 한 조각으로 보았다는 걸 의미합니다. “분분한 경계를 알려 하지 말고, 똑똑히 분간하는 마음을 살펴보라. 이 몸이 내가 아닌 줄 안하면, 번뇌가 어떻게 침범하리오?” 이 말은 조형의 법장쇄금록에 나온 문구를 채근담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현대사회에 와서 내가 무아(anatman)의 개념을 익호고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과연 무아를 인식하고 그걸 곧이곧대로 믿으면 내 마음 속에 번뇌가 침범하는 걸 막아내고, 고뇌와 쓸모없는 기호를 줄일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내가 행복해지는데 어떤 효용이 있는 것일까요?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때, 이런 건 본말이 전도되었을 때 기괴한 괴물이 탄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경계심이 듭니다. 무언가의 효용을(나의 행복이나 번뇌와 고민을 덜어내는 등)을 바라고 억지로 나 자신의 경계를 허물어 무아론을 믿고 따르려는 시도는 참으로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요?
이 몸이 내가 맞는지 아닌지를 먼저 질문을 던지고 과연 나 자신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궁구하다 마침내 답을 내어 거기에서 이러저러한 효용을 본다면 그러한 과정들이 의미있는 것이겠으나, 지금 내가 괴롭고 번뇌에 휩싸여 있는 상태에서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허상이므로 어서 빨리 깨어나고 싶다는 도피의 목적으로 이러저러한 무아론을 탐닉하고 고찰한다면 참으로 기괴하고 어이없으면서 동시에 불쌍한 일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말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거대한 화두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그 화두에 대한 답이나 결과가 아닌 화두를 풀어가는 방법과 첫 시작에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