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석공 이야기

탈무드에 세 명의 석공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배당을 짓기 위해 세 명의 석공이 뜨거운 태양 아내에서 돌을 쪼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노인이 세 석공에게 “지금 무엇을 하고 있소?”라고 물었죠.

첫 번째 석공은 “돌을 깨고 있습니다. 죽지 못해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두 번재 석공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을 하고 있지요. 굶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지요.”라고 답했구요.

세 번재 석공은 “예배당을 짓기 위해 돌을 다듬고 있습니다. 예배당이 완성되면 정말 아름다운 건물이 될 겁니다. 보람된 일이지요.”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탈무드에서 말하고 싶은 건 세 번째 석공처럼 살아라는 거겠죠. 뭐 그냥 그게 정답이겠거니 암기식으로 외우고 넘어가기 전에 생각을 더 연장해보면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첫 번재 석공은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일단 삶에 목적도 없으며 책임도 지지 않는 삶입니다. 삶에 목적이 없으니 기쁨이나 성취감을 느끼지도 못하며, 책임을 지지도 않으니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거나 평가하지도 않습니다. 스스로는 움직이지 못하고 누가 시켜야만 움직이니까 노예가 아니라, 삶의 목적을 모르고, 자신의 삶에 책임질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노예인겁니다.

이런 노예의 삶을 사는 이들 중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감정의 노예가 된 사람들입니다.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지독하게 사랑(또는 집착)하거나, 누군가를 원망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너무나 강력해서 “욕망의 화신”이나 “복수의 노예”가 되었다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이들은 모두 “노예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삶의 목적을 자신의 원초적 감정에 봉사하는 것으로 정하는 게 어떻게 주체적인 자유인의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감정과 욕망의 노예들에게 “삶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크나큰 착각이지요.

이렇게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만약 권력과 힘이 주어진다면, 또는 자유가 주어진다면 그 사람의 삶이 나아지고 행복하게 될까요? 아닙니다. 목적이 없는 삶에 힘과 권력, 자유가 주어진다 해도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건 불가능합니다. 목적 없는 삶에서 가능한 건 기쁨이 아니라 쾌락입니다. 책임지지 않는 삶을 사는 이들에게 힘과 권력이 주어지면 방종과 방탕함에 빠지게 되겠죠.

물론 이런 노예의 삶이 곧바로 “불행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쾌락이나 집착하는 대상에서도 위안을 얻을 수 있고, 심지어는 거기에서 행복감을 얻을수도 있습니다. 다만, “행복한 노예”를 벗어나지 못할 뿐이죠. 그게 무조건 나쁜거라고 욕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만족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않을 권리는 있습니다.

두 번째 석공은 “일꾼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일꾼이란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며, 일정한 무게의 책임을 짊어진 사람을 뜻합니다. 가족을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상관없이 이들을 부양하고 먹여살리기 위해 일을 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내던지지 않았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한 책임의 대상이 꼭 가족이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느낄 수도 있으며, 자신이 속한 집단, 공동체, 국가, 또는 전세계 인류에 대해 숭고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자기희생을 하는 위대한 위인도 일꾼의 삶을 살아갈 수 있지요.

일꾼과 노예가 뭐가 다르냐 반문할 지 모르나, 노예와 일꾼이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건 이들에게 힘과 권력이 주어졌을 때입니다. 책임을 떠안고 묵묵히 소박한 삶을 지탱해나가던 일꾼에게 힘이 주어지면, 그는 그야말로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힘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은 이들에게 빛이 되어줄 수 있는 게 일꾼의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꾼의 삶을 사는 것을 결코 비웃거나 깔보면 안됩니다. 현실에선 누군가를 제대로 책임지며 사는 사람이 되는 것도 결코 쉬운게 아닙니다.

세 번째 석공은 “여행자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들에게는 먹고 사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차원을 초월해서 더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자신의 쾌락이나 원초적인 감정 같은 개인적인 이해득실이나, 누군가를 책임지는 문제는 궁극적인 삶의 목적 앞에서 부질없고 사소한 걸림돌에 불과하지요.

그러한 삶의 목적을 꼭 종교에서 찾을 이유는 없습니다. 종교가 아니라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삶의 목적들은 다양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발견한 목적을 향해 여정을 시작할 수 있는가입니다. 여정을 떠나기 위해서는 지금 내 삶을, 지금까지의 나 자신을 헌신짝처럼 벗어던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길이며,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칭송하면서도 따라하지 못하는 길입니다.

다만, 이러한 세 석공의 비유가 상징하고 있는 각자 다른 형태의 삶, 즉 노예의 삶과 일꾼의 삶, 그리고 여행자의 삶은 우리가 마음먹고 선호한다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건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여행자의 삶을 산다고 해서 여행자의 삶을 살 수 있는게 아닙니다.

다른 이들은 깨닫지 못했던 진정한 삶의 목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또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따라야 할 정도의 절박한 삶의 목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도 여행자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가능한 건 위선자의 삶, 기만자의 삶 밖에 없겠죠.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자각이 없다면 나는 절대로 일꾼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가능한 건 그저 자기만족을 위해 적선을 해주는 정도일 뿐이죠.

결국, 중요한 건 내 삶을 결정하는 가장 궁극적인 요소는 다름 아닌 “삶의 목적”과 “책임감”에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모든 고민과 성찰은 바로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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