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테리스 파리부스(Ceteris Paribus)

제목에 있는 세테리스 파리부스라는 단어는 라틴어인데, 직역하면 “여타조건은 불변”이라는 뜻입니다.

고등학교때 배우는 경제학에서 수요공급곡선이라든지 여러가지 수식들이 나오는데, 현실에선, 그렇게 이상적이고 수학적인 결과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래프나 수식을 공부하는 의미가 있는 이유가 바로 이 세테리스 파리부스를 전제하고나서 세상을 단순하게 가정했을 때 이러한 일반원리가 도출될거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세테리스 파리부스라는 단어는 꼭 경제학이나 사회과학에서만 필요한 개념이 아닙니다. 당연하지만, 물이 언제나 섭씨 100도에서 끓는게 아닙니다. 기압이나 물에 섞여있는 불순물, 습도같은 것에도 천차만별로 다른 결과를 낼 수 밖에 없지요. 수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원칙 또한, 이 삼각형이 평평한 2차원 평면에 있을 때를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거든요.

이렇게 하나의 현상을 설명하는데 여러개의 변인이 존재한다면, 인간의 두뇌로 이걸 다루는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제약과 조건을 전제해서 하나나 두개 정도의 소수의 변인으로 단순화해서 현상을 설명하려 시도하는 단순화는 경제학 뿐 아니라 모든 학문에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러한 시도를 경제학에서도 실천했던 마샬이 얼마나 위대한 경제학자인지는 새삼 재론할 이유가 없지요. 말 그대로 현대경제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인간을 집체, 즉 집단의 일원으로만 논의되던 경제학을 하나의 개체로 독립해서 다루기 시작할 수 있었던 것, 즉 경제학에서 정치와 도덕, 그리고, 가치를 배제하는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마샬의 업적이 없었더라면, 현대 경제학은 성립이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학문의 영역에서는 당연하고 자동적으로 전제되는 세테리스 파리부스가 생략거나 잊혀진채 대중이나 정치인에게 전달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주류경제학이 이러이러한 원칙을 발견했는데, 왜 사람들은 이런 원칙을 믿지 않느냐며 교조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실제 현상과 이렇게까지나 괴리가 있는데 왜 그런 허튼소리를 믿어야 되느냐면 학문적인 영역에서조차 이를 반동이라고 배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론 그 자체의 현상을 설명하는데 얼마나 효용이 있느냐를 논하는게 아니라, 그런 주장이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는데 이용될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려는 충동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정파성 내지 당파성에 메몰되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개념이 다름아닌 이 세테리스 파리부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떤 이론이나 정책을 옹호하는 쪽이든, 반박하는 쪽이든, 대전제인 이 세테리스 파리부스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난 다음에 논의를 한다면, 어느 진영이든 더 건강한 토론을 하는게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수많은 정부의 정책들을 논할 때에도 그렇고, 특히나, 의사로서 의료정책에 대한 논쟁들 또한 그렇게 돌아가는 모습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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