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소시적에 공부를 한적이 있어서 불교의 핵심 3교리, 즉 3법인이 있다는건 압니다.
일체개고, 제행무상, 제법무아
이 세상 모든 현실이 다 나로 하여금 고통을 일으킨다는 일체개고의 苦는 통증이나 괴롭다는 감정상태를 의미하는게 아니라 나 자신의 실체를(무상, 무아) 깨닫지 못하고 집착을 거듭하여 안타까운 악순환의 고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제행무상의 無常은 세상의 모든 현상과 존재가 찰나의 순간마다 시시각각 생성과 소멸, 변화를 한없이 반복하는 항상성이 결여된 상태, 다른 말로 滅, Anitya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 말하는 필멸성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 무상의 개념은 훨씬 고약한 종류의 필멸성인데,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 말하는 필멸성은 원인이 존재하고 그 원인에 연결되어 존재하는 소멸임에 반해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은 원인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필멸성입니다. 원인이 존재하고 연기론처럼 인과의 끈이 연결되있는 소멸이라면 그 원인을 파악해서 소멸을 막아내고 항상성을 추구하는 간섭과 조작이 가능하지만, 불교의 무상은 그 원인도 없고 전후에 인과의 끈이 연결되어있지도 않기 때문에 그러한 생멸변화에 내가 간섭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심지어 어떤 불교분파에서는 우리가 인식도 할 수 없을정도의 짧은 시간 안에 무한히 많은 생성과 사멸이 수없이 반복된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찰나멸). 이러면 당연히 소멸과 변화에 간섭한다는건 불가능한 겁니다.
그렇게 통제 불가능한 소멸과 변화 안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성을 꿈꾸고 착각하며, 심지어는 이를 집착하기 때문에 일체개고의 현실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제법무아(無我, anatman)는 나라는 독립되있고 고정된 실체, 즉 영혼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나라는 존재는 잘못된 인식, 즉 착각에 불과해 마찬가지로 집착과 이로인한 일체개고를 불러일으키없다는 설명입니다. 힌두교의 아트만(atman)사상과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대척점입니다. 착한 일을 하면 극락정토에 간다, 나쁜 업을 쌓으면 지옥이나 나락에 떨어진다,,, 이런 가르침은 실상은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의 이 3법인에 위배되는 가르침으로, 스님이 이를 포교하는건 어디까지나 방편에 불과하다는 방편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여기가 종교게시판도 아니고, 제가 불교신자도 아닌데 이 3법인에 대해 길게 쓴 이유는 투자의 대가인 하워드 막스가 이런 가르침을 일본에서 배우고 깊게 감명을 받아서 자신의 투자에 접목시켰기 때문입니다. 내가 실체가 없고(무아) 세상에 영원하고 붙잡을만한게 전혀 없다면(무상) 불교가 얼핏 허무주의를 퍼트리는건가 할지 모르지만, 불교가 도출하는 결론은 이와 정 반대입니다. 오히려 세상의 무상함에 슬퍼하고 허무함을 느끼는 그것이 헛된 감정에 빠져 일체개고의 악순환을 더하는 것이니 덧없는 감정에서 벗어나 지위나 명예를 탐하는 탐심을 버리고 오늘 하루의 소중한 생명이 이어지는 순간을 방일(放逸)함이 없이 정진노력(精進努力)하려는 정신적인 결의를 촉구하는것이 무상관입니다.
모든 투자상품의 가격에 사이클이 생기고 극단적인 저평가와 고평가를 오가는 이유는 사람들의 탐욕과 공포라는 항상성에 대한 환상과 집착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아무리 안타깝게 여기고 막으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최선을 다해 냉정하게 상황을 상황 그대로 인식하고 거기에서 가능한 한 최고의 결정을 하는것 뿐입니다.
특정한 투자대상에 꽃혀서 그 투자대상을 쫓아다니며 집착하면 그 투자대상을 결코 싼 가격에 살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가만히 있어도 마켓이 나에게 찾아와 이거 좀 관심 가져보는건 어떠냐고 아쉬운소리로 제안하는 그순간이 찾아올 때 그 대상을 싸게 살 수 있는거지요. 그런 상황이 오기 전까지는 집착하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게 효과적인 태도라고 내 이성이 결론내렸을 때 내 본능의 충동을 제어하고 이를 실천하면 그게 무상론에서 말하는 방일함 없이 정진하는 길과 일치하는 것일수도 있는겁니다.
워렌 버핏도 이런 무상론과 일맥상통하는 비유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투자에는 삼진아웃이 없고, 계속해서 마음에 드는 공이 오기를 기다리면 된다는 말도 하워드 막스가 언급한 무상론과 일맥상통하는 가르침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