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가 번영을 구가한 낙관적 시대였는데, 어찌어찌하다 보니 인터넷 호황과 몰락으로 막을 내렸다고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1990년대의 많은 부분은 우리 기억처럼 그렇게 신나지 않았다. 1990년대 말, 18개월간의 닷컴 열풍을 불러오게 된 그 당시 암울했던 전 세계적 분위기를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1990년대는 한바탕 축제 분위기 속에서 시작했지만,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는데, 90년대 중반까지 미국 경제가 침체기에 빠졌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침체는 1991년 3월에 끝났지만, 회복은 더뎠고 실업률은 1992년 7월까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이후로 제조업 경기는 단 한번도 온전히 반등하지 못했다. 서비스 경제로의 이행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고통을 수반했다.
1992년부터 94년 말까지는 총체적 불안의 시기였다. 케이블 뉴스에는 모가디슈에서 죽은 미국 병사들의 사진이 계속 나왔다. 일자리가 멕시코로 빠져나가면서 글로벌하와 미국의 경쟁력에 대한 불안감도 심화되었다. 이런 회의적인 분위기는 1992년 대선에서 현직 대통령 조지 부시를 물러나게 만들었고, 로스 페로는 1912년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후 제3당 출신으로는 가장 많은, 20퍼센트에 가까운 득표를 기록했다. 록밴드 너바나와 그런지록, 헤로인에 심취한 문화가 실제로 무엇을 반영하고 있었든 간에, 결코 희망이나 자신감의 표출은 아니었다.
실리콘밸리 역시 부진을 겪고 있기는 마찬가지였고, 반도체 전쟁은 일본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인터넷은 비상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1992년 말이 되기 전까지는 인터넷의 상업적 용도에 제한이 있기도 했고, 아직 사용자 친화적인 웹 브라우저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스탠퍼드 대학교에 입학한 1985년에 가장 인기 있었던 전공이 컴퓨터과학이 아니라 경제학이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많은 것이 짐작될 것이다. 대학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술 분야란 특이한 것, 심지어 주변적인 것으로 보였다.
이 모든 것을 바꿔놓은 게 인터넷이었다. 1993년 11월 모자이크 브라우저가 공식 발표되면서 일반인들도 온라인에 접속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후 모자이크는 넷스케이프가 되었고, 넷스케이프는 1994년 말에 네비게이터 브라우저를 출시했다. 네비게이터를 채택하는 사람이 급속히 늘어나면서(점유율 80%에 육박) 넷스케이프는 아직 이익도 나고 있지 않던 1995년 8월에 이미 기업공개를 단행할 수 있었다. 5개월 만에 넷스케이프 주식은 주당 28달러에서 174달러로 수직 상승했다.
다른 기술기업들도 호황을 맞기는 마찬가지였다. 야후는 1996년 4월에 8억4,800만달러의 시장가치를 인정받으며 상장되었다. 아마존은 1997년 5월에 4억3,800만달러에 상장되었다. 1998년 봄이 되자, 각 회사의 주가는 4배 이상으로 뛰어 있었다. 회의적인 사람들은 인터넷 기업이 비 인터넷 기업보다 매출이나 이익이 몇 배나 높다는 주장을 의심했다. 그리고 그들은 어렵지 않게 시장이 미쳤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런 결론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엉뚱한 데서 이런 지적이 나왔다는 점이다. 1996년 12월(실제로 버블이 붕괴된 것보다 3년 이상 앞선 시점이었다), 연준 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은 비이성적 과열이 자산가치를 과도하게 높여 놓았을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그린스펀의 이 발언으로 미국ㅔ의 주가가 폭락했다). 기술 부문 투자자들이 과열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로 그 정도까지 과열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당시 나머지 국가들의 경제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7년 7월, 금융위기가 동아시아를 강타했다. 정실 자본주의와 대규모 외화부채는 태국과 인도네시아, 한국 경제를 무릎 꿇렸다. 뒤이어 1998년 8월에는 루블화 위기가 따라왔다.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시달리던 러시아는 루블화를 평가절하했고, 국가 부채에 대해 디폴트를 선언했다. 미국의 투자자들은 1만 개의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가 돈이 바닥났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꼈고, 다우지수는 단 며칠 만에 10퍼센트 이상 곤두박질 쳤다.
사람들의 걱정은 옳았다. 루블화 위기는 연쇄반응을 촉발했고, 과도한 레버리지 전략을 펼치고 있던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를 무너뜨렸다. LTCM은 1998년 하반기에만 46억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는데, 그러고도 1,000억 달러 이상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결국 연준이 개입했고, 대규모 구제금융을 실시하는 한편, 이 사태가 경제 전체의 재앙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대적인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유럽도 사정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회의론과 무관심 속에 유럽은 1999년 1월 유로화 유통을 시작했다. 유로화는 거래 첫날 1.19달러까지 상승했지만, 2년 후에는 0.83달러로 내려앉았다. 2000년대 중반에는 G7 중앙은행장들이 수십억 달러의 시장개입을 통해 유로화의 가치를 지탱해줘야 했다.
반짝 불고 사라졌던 닷컴 열풍이 1998년 9월부터 시작된 데는 다른 모든 것들이 가망 없어 보인다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작용했다. 구경제로는 글로벌화라는 난관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미래가 오려면 뭔가 하나쯤은, 그것도 제대로 먹히는 게 있어야 했다. 다른 대안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인터넷 경제라는 신경제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피터 틸의 제로 투 원은 오래 전에 출간했지만 정말 좋은 책이고, 투자자라면 한 번 읽는걸로만 끝내서는 안되는 명저라고 생각합니다. 피터 틸의 시선에서 바라본 IT버블에 관해 짧게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옮겨와봤습니다. 사실, 해당 내용의 주제는 버블에 관한 것이 아니라 좋은 기업의 요건에 대해 논하는 챕터의 일부분이지만, 지금 거침없이 상승 중인 주식시장, 특히 나스닥 빅테크 주식들을 바라볼 때 새로운 관점을 던져주는 내용이 아닌가 합니다.
구경제와 신경제라는 용어가 나오고,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을 나누는 구분이 생겨난 가장 큰 이유가 다름아닌 시대의 절망 때문이었다는 점은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1990년대와 비교할 때 2023년인 지금은 아직 “절망”이라고 부를 정도로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는 그런 시대는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다극화가 진행되며 긴장이 높아져가고, 전세계 경제가 인플레이션의 그림자 때문에 쉽지 않은 시절을 보내고 있으나, 달러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원자재 수출국이나 일본같이 투자매력이 있는 곳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미국도 여전히 소비와 고용이 견조하고, 열심히 투자를 유치한 덕에 경기침체가 급격하게 올 것 같지는 않아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의 나스닥과 빅테크주식들의 상승은 닷컴 열풍 정도의 거품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만약 이들 인공지능 관련 거품이 진짜 거품이 된다고 한다면, 가격적으로도 지금보다 훨씬 심한 고평가에 들어가야 하며, 그 과정 또한 닷컴 버블 때 못지 않게 “다른 대안이 없는” 분위기, 유일한 대안으로 추앙받는 분위기가 극적으로 나와야 할거라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의 경제가 지금보다 더 나빠지고, 원자재 수출국이나 일본같이 현재 투자하기 좋은 곳으로 불리우는 곳들이 모두 무너지고 자빠지는데에 더해 현재 주목받고 있는 나스닥 빅테크 주식들의 일부도 넘어지면서 “정말 다른 대안이 없다”는 분위기가 더 강화되는 과정을 밟아야 진짜 버블이 형성된다 생각합니다.
그렇게 다른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대중의 절망과 절박함이 증폭되어야만 버블의 광기가 꽃을 피울 것이며, 그러한 광기의 꽃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시들며 시장 참여자들을 나락으로 몰아가게 될 것입니다.
결론은, 지금 인공지능 버블은 진정한 의미의 버블 단계가 아직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상승여지도 많이 남아있고, 대중의 확신을 얻기 전까지 여러번 흔들리거나 정체되는 과정도 거칠 것이라 봅니다. 또한, 본격적인 경지침체가 와서 지금의 상승세가 꺽인다 해도, 거품 붕괴 수준의 패닉이나 참사가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며, 어느정도 시간이 지난다면 또다시 “다른 대안이 없다”는 분위기를 토대삼아 주가가 올라가는 과정이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