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계몽주의 시대 프랑스에서 발생한 경제이론이다. 중농주의에 따르면 국가의 부는 오로지 농업의 가치에 의해 발생하며, 농산물의 가격은 높게 책정되어야 한다. 중농주의는 18세기 하반기에 크게 유행했으며, 체계적으로 수립된 최초의 경제이론으로 평가받는다.
중농주의의 영수는 케네(1694 ~ 1774)와 튀르고 남작(1727 ~ 1781)이었다.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판하여 최초의 근대적 경제학파인 고전경제학을 창시한 것이 1776년이므로, 중농주의는 최후의 전근대적 경제학일 할 수 있다.
중농주의의 가장 큰 유산은, 노동의 결과 만들어지는 생산물을 국부의 원천이라고 방점을 찍은 데 있다. 이 점에서 중농주의는 그 이전까지의 경제학파, 특히 중상주의와 차별화된다. 중상주의는 지배자의 부, 금보유고, 무역수지 등을 중요하게 여겼다. 반면 중농주의 경제학에서는 사회의 생산물은 판매의 그 순간, 판매자가 자신의 생산물을 자신의 생산물의 이전 가치보다 높은 값의 돈을 받고 교환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라 보았다. 중농주의 경제학은 노동을 가치의 발생 원인으로 지목한 첫 번째 시도였다는 데서 유의미하다. 하지만 중농주의자들은 상술한 사회적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은 농업 노동뿐이라고 생각한 데서 그 한계를 갖는다. 중농주의에서는 “산업적”, 비농업적 노동을 농업노동에 딸린 “비생산적 부록”이라고 판단하였다.
중농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이념을 만들어가던 시기의 경제는 거의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중농주의자들은 농업노동만을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중농주의자들은 상품과 용역의 생산은 진정한 생산이 아니라 농업의 생산물을 소비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이 시대의 자본가적 생산 이윤은 농업 생산이 이루어지는 농지의 지주가 걷는 지대 뿐이었다. 중농주의자들은 도시의 인공성을 저주하고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을 상찬했으며 농민을 축복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경제학파(프랑스어: économistes)라고 불렀으나, 중농주의 이후에 발생한 경제학 학파들과의 구분을 위해 오늘날 그렇게 일컫는 경우는 거의 없다.
중농주의는 태양왕이라 불리던 루이14세가 숱한 전쟁을 통해 망쳐놓은 프랑스 경제, 특히나 막대한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시도되었던 지폐 시스템이 붕괴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대두된 철학입니다. “존 로”라는 희대의 천재이자 도박꾼이 보여준 지폐 시스템의 비젼은 누구의 책임(존 로, 아니면 섭정 오를레앙 공작)이 크던 간에 결과적으로 처절한 실패로 끝났고, 수십년 이상 프랑스에서 상업계급과 자본가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전쟁 후 똑같이 막대한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자본주의가 더욱 확장되던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귀족과 지주들의 입김이 강화되며, 이들의 이익에 영합하는 철학이 세력을 얻게 되는데, 이게 바로 중농주의라고 합니다.
위키백과에는 케네와 튀르고 남작을 중요하게 언급하지만, 이들보다 먼저 농업지상주의를 부르짖으며 중농주의의 시작을 알린 사람은 리샤르 캉티용(Richard Cantillon)입니다. 그는 저서인 상업론에서 농업을 조세와 인위적인 규제에서 해방시키면 자본을 생산할 것이며, 이것이 경제성장을 가져온다고 주장합니다. 오직 농업에 국한해서는 자유시장 이론과 비슷한 주장을 한 것인데, 재미있는 건 그가 상인이자 은행가였을 뿐 아니라, 처음에는 존 로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1720년 파랑스 주식폭락사태 이후 입장을 바꿔 금융세계를 비난하고 공격하면서 중농주의자로 변신한 것입니다.
그의 저서인 상업론에서 자유방임이란 “토지는 물질의 원천이며 여기에서 모든 부가 생산된다”는 그의 대전제가 온전히 실현되기 위해 조세, 규칙, 규제들을 없애는 것을 의미하며, 경제적 균형이란 가장 중요한 생산자가 누구인지를 찾아내어 그들에게 완전한 자유방임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저서가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논지는 전적으로 지주와 귀족들을 표적으로 한 맞춤 이론이었습니다. 객관적인 사실들에서 중요한 원칙과 원리를 끌어낸 게 아니라, 존 로의 금융실험이 파탄나서 상업에 대한 희망이 무너진 시대상을 반영해 새롭게 떠오르는 계급들에 영합하려는 목표를 먼저 설정해 둔 다음 자신의 맞춤 주장들에 맞는 데이터들을 취사선택하는 방식으로 책이 써지다보니, 그가 근거로 들었던 자료들과 통계들은 정확하지도 않았고, 사실과 동떨어진 것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이미 수백년에 걸쳐 쌓여진 도시들의 상업통계들을 모조리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새롭게 주도권을 잡을 귀족들의 필요와 존 로의 지폐시스템 실험에 절망한 이들의 수요에 캉티용의 주장들만큼 유혹적인 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수많은 결함들에도 불구 이후 수많은 후학들에 의해 추앙되거나 수정, 비판되며 계승되게 됩니다. 그러한 주장들 중 가장 괄목할만한 개념은 다름아닌 노동가치론입니다. 노동의 경제적 가치나 중요성을 주장한 학자들은 이전에도 매우 많았지만, 그러한 가치를 실제로 계산해내려고 시도했던 사람은 캉티용이 최초입니다.
캉티용은 스스로 마련한, 그러나 과학적이지 못한 오류투성이 통계에 의지해서 토지에서 수확물을 거두는 데에 필요한 노동량에 따른 농업 산출량의 순가치를 계산했고, 수확 중에 얼마나 많은 양이 토지 소유자에게 노동, 지대, 유지비 등의 명목으로 돌아가는지를 설명했습니다.
결국, 상업행위로 인한 가치창출이라는 측면은 놀랍도록 무시한(제조물의 가치는 원자재의 가치로 결정된다 주장) 계산이지만, 그러한 노동의 가치를 계산하려고 시도한 것 자체는 최초였기에 노동가치론의 시조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렇게 당대의 프랑스 귀족들과 지주들에 봉사하기 위해 했던 주장들 중 하나인 노동가치의 계산시도가 이후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카를 마르크스에 이르는 주요 경제사조들에 주춧돌로 기능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세상 일이라는 참 어처구니없고 재미있는 일 투성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