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개입은 후퇴를 위한 보이는 손이며, 진보를 위한 보이지 않는 손보다 역사적으로 유력하지 못했다”
신자유주의자의 대부인 밀턴 프리드먼이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인용한 위의 발언은 굉장히 유명하며,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비유를 가장 널리 알려지게 소개한 사람 또한 밀턴 프리드먼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애덤 스미스가 이 말을 썼는지 원전을 찾아서 학인해본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그가 썼던 국부론, 도덕감정론 같은 책들이 하나같이 천 페이지가 넘는 엄청나게 긴 책이고, 다루는 내용 또한 오늘날의 경제학과는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대문에 쉽게 읽어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위 링크는 한국 행정학보에 기고된 논문 “적정의 감각에 바탕한 보이지 않는 따뜻한 손 : 국부론과 도덕정서론에 나타난 자기애와 이기심의 차이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다운받을 수 있는 링크입니다. 유료로 다운받을 수 있지만, 초록 내용만 봐도 내용의 핵심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 – 이기심과 자기애의 구별


애덤 스미스의 저작들에서 selfish는 명백히 부정적인 감정으로서의 이기심을 지칭하고 있으며, 그러한 이기심에 대비되는 긍정적인 감정으서는 사익추구에 관한 신중한(prudent, 개인적 차원의 행복증진을 위해 분별력 있지만 남의 희생을 수반하지 않는) 사랑의 한 형태로서 자기애(self-love)를명시하고 있지만, 국내 번역본에서는 이들을 모두 “이기심”으로 번역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저자인 애덤 스미스의 의도를 왜곡해서 “합리적 이기주의자를 사회성원으로 간주하려는 시도”를 번역을 통해 저질렀다는 거지요. 애덤 스미스는 그의 저작에서 한번도 이기심을 긍정적인 것으로 본 적도 없고, 이기심을 강조한 적도 없는데도, 합리적 이기주의가 자유방임을 통해 결과적, 실증적으로 최선의 결과를 유발한다는 자유시장주의의 도그마를 애덤 스미스가 암시하기라도 한 것처럼 왜곡된 번역과 편집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참으로 무겁다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 – 애덤 스미스의 주장들은 모두 스토아학파와 그리스철학자들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


애덤 스미스가 교수직을 얻어 강의를 시작한 주제, 즉 전공은 고전 수사학, 도덕철학, 순수문학들이었습니다. 그의 첫 저술활동은 에든버러 리뷰에 루소의 불평등 이론과 공감이론을 비판하는 레터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누가 보더라도 전형적인 스토아철학자였고, 그 또한 그런 평가를 만족해 하고 있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루소가 “농업과 야금의 발달이 사유재산과 불평등을 낳는다”는 주장들 중 농업을 제외한 제조업과 상업이 악하고 탐욕스러운 경향을 초래한다는 것만을 인정하였으며, 그러한 악한 경향들 마저도 선의와 자비심을 지닌 부유하고 법을 준수하고 토지를 소유하고 교육을 받고 합리적인 남성 지주가 지도적인 시민이 된다면 이를 제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에든버러 리뷰에 기고했던 레터에 실려있던 그의 도덕철학에 기반한 주장들이 크게 변하지 않은 채 도덕철학론이나 국부론과 같은 그의 저서들에서 계승 발전되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하나 – 애덤 스미스는 일관되게 자유 방임”에 반대해왔고, 도덕과 교육의 간섭과 통제를 주장했다.
애덤 스미스는 상인들이란 이기적이 이들이며 혹시라도 상인들이 선한 일을 행한다면 이는 “전혀 의도한 것이 아닌, 그 목적을 실현하려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상인들을 본능적인 탐욕과 이기심에서 끌어내는 “보이지 않는 손”이란 바로 사회이자, 사회를 이끄는 이들인 지주 지배엘리트들을 의미합니다.
애덤 스미스의 모든 저작들 중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나오는 대목은 세번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비유는 “자유시장”이나 “자유방임”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지주로 구성된 지배엘리트들에 의한 직간접적인 간섭과 통제를 의미하는 맥락으로 연결됩니다.
한마디로, 애덤 스미스의 주장 대로라면, 지배 엘리트들의 도덕적 무장에 기반한 통치와 제도들을 “보이지 않는 손”으로 비유한 것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애덤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 경제와는 정반대를 지향하는 복고론자 내지 도덕철학자로, 고대 로마의 키케로가 주장하던 경제적 이상향을 계승한 사상가로 보는게 정확할 것입니다.
요즘 제이컵 솔이 쓴 “자유시장”을 읽고 있습니다만, 내용이 흥미로움에도 꼼꼼이 자료를 찾아가며 읽느라 속도가 더뎌지고 있습니다. 특히 애덤 스미스가 나오는 부분들에서 자유시장주의를 주장하던 경제학자들이 애덤 스미스의 말과 글들을 너무 심하고 역겹게 왜곡하고 자기들 의도대로 취사선택하여 인용해왔었는지를 돌이켜 보면서 분한 마음을 누르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왜 자기 자신의 주장을 옳게 여겨지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했던 말들을 제대로 다 읽거나 듣지도 않고 자기 쓰고 싶은대로만 인용하거나, 은근슬쩍, 또는 노골적으로 왜곡과 짜집기를 하는지,,, 그런 작태를 서슴없이 저질렀던 패역한 자들이 오히려 지금에 와서도 학계의 태두로 존경받으며 떠받들어지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참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걸 가지고 화를 낸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거짓들을 널리 알리고, 때가 될 때마다 이런 왜곡과 편집으로 애덤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무슨 자유방임주의를 지지하는 비유인것처럼 언급하는 주장들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이들에게 그런 성의없는 자가복제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를 지적하는 것을 계속 쉬지 않는 것이 진정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실천이 될 것이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