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커닝엄은 열렬한 자유시장 사상가이자 가격탄력성, 수요와 공급의 가격결정 그래프, 부분균형이론등을 고안한 앨프리드 마셜과 함께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지만, 그는 1905년에 마샬과 정반대로 당시 영국의 지배이데올로기였던 자유시장사상을 강렬히 비판하는 “자유무역 운동의 흥망(The SRise and Decline of the Free Trade Movement”라는 저작을 출간합니다. 아래는 그의 저서에 나오는 내용들의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사회를 하나의 매커니즘으로 다루는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의 전통이 어느정도까지는 각진 진리를 내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결코 온전한 진리가 아니다.
정말로 경제학이 하나의 과학으로 취급받고자 한다면 인간의 경제활동 중 대다수는 매커니즘처럼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회란 오히려 그 환경에 스스로 적응해 나갈 힘을 가진 유기체에 가까우며, 이 또한 툭하면 깨진다. 이 사회라는 기계를 계속 굴러가게 하려면 계속 반복하여 시험을 해보아야 하며, 그렇게 하더라도 자유시장 사상이 표방하는 저 위대한 기계적 진리라는 것은 전혀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자유로운 교역을 옹호하는 이들이 전제로 삼는 목적들에 진심을 담아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만약 보호주의 국가인 미국 뉴욕에 가서 어느 부자를 만나 같은 견해인지 묻는다면, 아마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할 것이다.
자유로운 교역이라는 사상은 영국에서는 거의 종교에 가까운 이데올로기이지만, 이 이데올로기가 이제 파산했다.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 미국이 “콜베르티즘적(국가의 주도 하에 진행되는 산업진흥)” 개혁을 통해 영국의 거대한 적수가 될 것이다.
코브던(자유무역을 통해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주장)이 꿈꾼 평화와 무장해제의 희망은 결코 실현된 적이 없다. 오히려 미국과 유럽에서는 군국주의만 자라났으며, 영국은 최고의 권력을 가진 제국이지만 여전히 해군과 육군의 힘에 의존하는 상태이다.
자유무역주의자들이 자신들이 믿는 경직된 정통 학설을 지지해 줄 진리를 더 찾아내기 위해 구약성경을 읽고 또 읽는 “유태교 랍비 주석가”처럼 되어버렸다. 자유무역은 이제 더 이상 현실에서 실용적인 의미를 갖는 원칙이 아니라 낡고 구속적인 소비주의 종교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영국은 아무런 이탈도 없는 엄격한 규칙을 따르다가 파멸에 이를 운명이 될 것이다.
자유방임이라는 원리가 모험적 사업에 뛰어드는 사람들을 통해 국가이익을 구축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탐욕, 그리고 공동선에 대한 무관심을 은폐하는 데 쓰이는 얕은 속임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애덤 스미스는 그의 후예들과는 달리 정부의 역할에 대해 훨씬 개방적인 입장이었다. 애덤 스미스가 산업과 경제발전을 촉발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인 독점체제들을 허용하는 게 종종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애덤 스미스는 그의 “도덕감정론”에서 키케로와 플라톤의 가르침을 따라 입법가들이 다른 나라들의 선례에서 교훈을 얻으라고 조언했었다. 또한 애덤 스미스는 “공동체의 이익의 중요성이 개인의 이익의 중요성을 압도한다”라고도 말했다.
그가 이 책을 쓴 1905년 경에는 영국은 이미 경제적인 면에서 정점에 도달해 더이상 혁신과 성장을 추동하지 못하는 반면, 독일, 미국, 일본 등은 자유무역의 핵심교리를 상당수 거부했는데도 불구하고 비약적으로 경제성장을 구가하던 시기였습니다. 독일과 미국은 산업팽창과 인구증가가 엄청나던 반면, 영국은 인구의 감소가 막 시작하던 상황이었죠.
이렇게 현실은 자유방임주의나 자유무역주의 어느쪽도 제대로 된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영국사회는 산업혁명 시기를 거쳐온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서 그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경직된 이데올로기로 굳어지다 못해 종교화까지 되버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러한 세태에 대한 커닝엄의 지적과 비판은 날카롭고 실랄할 뿐 아니라, 지금을 돌아보는 데에도 유용한 잣대가 되주고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사실입니다.
지금도 경직된 사고체계로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하면서 종교적인 신념과 경직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방임주의가 어쩌면 1905년 당시의 영국과 닮아있는 것인지 돌아보면, 새삼 놀라울 뿐 아니라 씁슬하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그들이 위대한 선각자이자 자유방임주의의 시조처럼 떠받드는 애덤 스미스의 저서들과 그 안에 담겨진 중요한 주장들에 대해조차 자신들의 신념과 경직적인 사고체계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거나, 알면서도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들까지도 1905년과 2023년이 닮아있는 것을 볼 때는 참으로 슬프면서도 허탈하다는 소감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