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 구지편(九地篇)


산지(散地, 흩어지기 쉬운 땅)

산지는 자기 나라 안에서 전쟁을 벌이는 곳이다. 병사들이 나라 안에서 싸우는 까닭에 고향을 더욱 그리워한다. 전쟁터와 고향 간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병사들은 쉽게 탈영한다. 산지에서는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경지(輕地, 가벼이 여겨지는 땅)

경지는 적의 영토에 침입했으나 깊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다. 병사들이 적지라는 개념이 없는 까닭에 언제든 쉽게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경지에서는 주둔해서는 안된다.

쟁지(爭地, 적과 아군 모두 방어에 유리한 땅)

쟁지는 아군이 탈취해도 유리하고 적이 점령해도 유리한 곳이다. 적은 병력으로도 능히 많은 적을 제압할 수 있고, 약한 전력으로도 능히 강한 전력을 이길 수 있으니, 쟁지는 공격하지 말아야 한다(점령에 비용이 많이 들어감).

교지(交地, 길이 사방으로 교차하는 지역)

교지는 아군이 진격하기에도 편리하고 적이 공격하기에도 편리한 곳이다. 길이 사방으로 교차하는 까닭에 뜻하지 않게 적군과 맞닥뜨리거나 아군의 행군위치가 쉽게 드러날 수 있으니, 교지에서는 교통이 차단되어서는 안된다.

구지(衢地, 네거리 땅)

구지는 여러 국가가 인접해있어 먼저 점령하면 천하의 백성을 모아 천하를 얻을 수 있다. 아군과 적군이 대치하는 지역이 제3국의 국경과 맞대고 있는 경우는 먼저 도착해 중립적이거나 소극적인 제3국을 끌어들여 아군을 돕도록 만들어야 한다. 구지에서는 인접한 제3국과 외교관계를 맺어야 한다.

중지(重地, 깊숙히 들어와버린 지역)

중지는 적의 영토 깊숙히 쳐들어가면서 점령한 많은 성읍들이 배후에 있는 곳이다. 적지 안으로 깊숙히 들어와 임의로 돌아가기 어려우니, 중지에서는 보급품을 현지에서 조달한다.

비지(圮地, 숲과 늪이 많은 땅)

비지는 산림이 우거지고 험하며 늪이 많은 지형으로 행군과 진격이 어려우니, 비지에서는 전투하지 말고 신속히 통과해야 한다.

위지(危地, 위험한 지역)

위지는 들어가기에는 길이 좁고 나올 때는 우회해야 하며, 소수의 적군이 다수의 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곳이니, 위지에서는 전략적으로 철수해야 한다.

사지(死地)

장애물과 적의 기습 위협 등으로 전진하기도 어렵고, 물러나기도 쉽지 않은 진퇴양난의 지형에서는 빨리 전투를 끝내면 생존할 수 있으나 빨리 끝내지 못하면 멸망하는 곳이다. 사지에선 결전을 해야 한다.


저번 글에서 손자병법의 구지편 이야기가 나와서 한번 소개해봅니다.

병법에서 지형은 실제 지리나 지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가 놓여진 상황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단순한 상황이 아니라 패하지 않기 위해서 특정한 행동이나 결단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 말입니다.

산지라는 지형을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단순하게 직역하면 전쟁이 나라 안에서 벌어지는 것을 피하라는 것이지만, 저자인 손자의 의도는 지형 자체가 아니라 “병사들의 심리”에 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자국 내에서의 전투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병사들이 탈영하고 전투의지를 내던지기 쉬운 상황을 피하라는 쪽으로 해석하는게 더 정확한 해석이라는 거지요.

요즘같은 현대시대의 전쟁이라면 오히려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하기 위해서라도 타국에 군대를 보내는 침략전쟁을 자제하는게 정답이 될 수도 있는겁니다. 이 경우 산지는 자국 영토가 아니라 타국 영토로 해석되야 합니다.

일단 누군가가 선점하면 수비하는게 수월하고, 적이 이를 점령하는 데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쟁지의 경우도 중요한 건 땅이 아니라 “상황”입니다. 아군의 병력이 적군보다 작거나 비슷한 경우에는 쟁지를 공격하는 건 곧바로 패착이 됩니다. 왜냐면, 이미 쟁지를 선점한 적군이 수월하게 수비를 하며 훨씬 효율적으로 우리 병력을 깍아먹게 되면 병력과 물자 면에서 적군이 우위를 점하게 되므로 전쟁 전반에서 아군이 패배할 확률이 급격히 올라갑니다.

하지만, 우리 병력이 적군을 압도하고 적군은 수세에 몰려있는 상황이라면 쟁지에서 많은 병력을 소모하는 것이 오히려 전체국면으로 본다면 전쟁을 빠르게 끝내고 승리할 수 있는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아군의 병력을 적군보다 훨씬 많이 소모하더라도 어찌저찌 해당 쟁지를 손에 넣은 다음의 아군과 적군의 전략적인 상황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원래부터 아군이 훨씬 많았었기에 병력의 차이는 그렇게 많은 비용을 지불했더라 우열이 바뀌지는 않는 대신, 이번에는 적군이 훨씬 많은 비용을 지불하며 쟁지를 재탈환 해야 하거나, 전략적으로 얼마 되지 않은 요충지 중 한 곳을 빼앗긴 적군은 더더욱 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유연성을 발휘하기가 어려워지기에 아군과의 격차는 우리가 지불했던 비용의 몇배로 커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땅 자체의 특성에만 교과서적으로 천착하지 않고, 상황의 중요성에 따라 유연하게 해석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쪽이 전략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점유하는 건 비단 전쟁만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모든 투쟁의 장에서 벌어지는 보편적인 원리라고 볼 수 있을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지혜를 짜내어 새로운 해석과 응용을 무궁무진하게 내놓으며 재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 고전이 정말 위대한 이유 중 하나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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