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과 그들의 악행이 심판받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많은 사람들이 악인을 미워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 악행을 미워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장 온라인 커뮤니티들을 들어가보면 정치판을 시작해서 기업, 연예계는 물론 각자가 근무하는 직장 상사나 사장들의 악함과 악행을 고발하고 씹고 뜯으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욕과 증오, 적개심을 증폭시키는 언어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사람들이 악인과 악행을 미워하지 않기 때문에 잘 먹고 잘 사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누군가에 의해 유도되고 조장된 특정인, 특정 집단을 향한 증오, 그렇게 누군가를 향해 증오하는 행위가 이끄는 카타르시스와 집단적 일치감에 취해 비판적인 사고와 냉정한 현실인식을 게을리하는 버릇이야말로 악인을 지켜주는 진정한 악의 방패가 되어왔습니다. 인간의 증오, 가공된 악과 악인을 향한 적개심이야말로 인간사회에서 악이 살아남고 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유용한 전략입니다.
무언가를 대상으로 하는 “악마화”야 말로 진정한 악인이 악행을 저지르고도 심판을 피하고 빠져나가는 데 쓰이는 가장 강력한 방편이라는 거지요. 이런 음험한 악행을 일삼는 자들은 지금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을 가장 적나라게 묘사하는 단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들이 수천년 동안을 번번이 끔찍한 악행을 저지르고도 별 탈 없이 잘 빠져나가는 데에는 대중이 증오심이라는 감정에 한 번 빠지면 이성과 냉정함을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사회를 좀먹는 진정한 악을 인식하고, 우리가 사는 사회를 더 선하고 정의롭게 만들어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악을 향한 증오와 적개심을 거두어야 합니다. 대중이 감정적인 격류에 쓸려서 제대로 된 이성과 판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순간이야말로 우리 사회 가장 악한 자들의 술수는 “거짓말”과 “선동”이라는 형태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가 우리 사회의 진보와 정의를 위해 두 눈과 귀를 열고 열심히 색출하며 경계해야 하는 건 “악”이 아니라 “거짓말”과 그 거짓말에 기반한 “선동질”이어야 합니다.
요즘 의사들,,, 정확히는 전공의들의 파업을 두고 수많은 이들이 증오와 분노에 가득찬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을 때려잡을(?) 윤석열 정권의 무식한 폭압에 대항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속시원하다며 환영하는 글들을 어디에서든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어쩌다 윤석열 정권보다 의사가 우선해서 때려잡아야 하는 악의 집단이 되었을까요?
하기사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의사들만큼 악마화하기 쉬운 집단도 없는게 현실입니다만, 문제는 그렇게 증오와 분노, 적대감이라는 “감정”에 집단적으로 몰입하다 보면 우리 사회를 향해 더 치명적인 공격과 테러를 시도하는 자들이 그러한 대중의 감정 뒤에 숨어 무얼 꾸미고 작당하는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감정적인 영역을 일단 뒤로 밀치고, 의사집단이 우리 국민을 향해 “왜 의사증원에 반대하는지”를 냉정하게 들어본다면, 의사들의 주장을 그렇게 악마화를 해가면서까지 탄압하고 틀어막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의사를 악마화하려는 자들, 그리고 악마화 된 의사들을 때려잡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이득을 얻으려는 자들은 정말로 의대정원을 늘리는 것이 우리 의료문제의 진정한 해결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박근혜정권 때의 정책실패로 필수의료현장이 망가져서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의사들이 더이상 진료를 할 수 없어 폐원 러시를 하게 만들었던 자들이 이에 대한 아무런 심판도 받지 않고 보란듯이 현정권의 보건복지부 요직을 차지하고서 같은 짓을 판을 더 키워서 벌이고 있어도 그들은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온갖 거짓말과 선동, 근거도 없는 주장들로 추진하고 있는 현정부의 의료 정책으로 수많은 의사들이 박근혜정권 때 당했던 것처럼 폐원을 강요당하고 의료현장을 떠나 다른 과나 비보험 영리의료에 종사하는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의사를 향한 “증오심”에 취해 이성이 마비된 대중의 무관심과 둔감함만 깨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심판받을 일은 벌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렇게 의료보험재정의 고갈과 의사인력 배분의 왜곡과 보험시스템 붕괴를 가속화시켜가며 종국적으로는 현행 행위별수가제를 조금씩 축소시키며 말려죽일 것입니다. 그렇게 “의료보험으로는 제 때 제대로 된 진료를 받을 수 없는 현실”을 명분삼아 의료민영화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것이며, 현재의 보건복지부 공무원들과 높으신 정치인들은 재벌대기업의 본격적인 병원사업 진출과 민간의료보험의 활성화의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로 떡고물을 얻어드실 겁니다.
뭐 그런 깊은 안목의 심모원려같은 게 없더라도 지금 당장 총선에서 여론의 주목을 받아 “선거 때 무슨 말을 못하겠냐”던 MB의 선례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 하나로도 그들에게는 충분히 질러볼 가치가 있는 소리들이겠죠.
의사들이라고 뭐 의로운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의료문제들에 대해 더 크게 목소리를 내고, 스스로 자정하고 희생하면서 진솔한 목소리를 냈더라면 지금과 같은 악마화를 감내해야 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으나, 의사들도 인간이고 결점 많은 불쌍하고 무지한 중생들이니 어쩌겠습니까? 정말 불쌍한 건 저들의 거짓말과 선동에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동원되어 증오의 불길 속에 내던져져서 냉정함과 비판의식을 거세당하고 있는 대다수 국민들이겠죠.
앞으로 지금같은 우리나라 고유의 의료시스템이 붕괴하는 와중에 제대로 교육받지도 못하고 쏟아져나올 후배 의사들과 자본의 논리로 의료민영화를 불철주야 획책하는 이들이 만들어나갈 미래를 생각하면,,, 기도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네요.
악이 악을 저지르나 무지와 무관심으로 심판받지 않는 세태가 이번에도 반복되지 않기를 감히 한 사람의 의사로 기원하고 기도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