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근담 20편
어떤 일이든 다 쓰지 않고 남겨두겠다는 마음가짐을 지닌다면
조물주도 나를 미워하지 못하고 귀신도 나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만약 하는 일마다 기어코 가득 채우려 하고
이룬 공마다 기어코 극성하기를 추구한다면
안에서 반란이 생기거나 밖에서 반드시 걱정거리를 불러온다
채근담 주석에는 송나라 때 재상인 왕백대의 “사류명”을 인용하여 본문을 풀어냅니다.
재능은 다 쓰지 말고 남겨서 조물주에게 돌려주고,
녹봉은 다 쓰지 말고 남겨서 조정에 돌려주며,
재물은 다 쓰지 말고 남겨서 백성에게 돌려주고,
복은 다 쓰지 말고 남겨서 자손에게 돌려주어라.
채근담의 저자인 홍자성이나 왕백대는 왜 자신이 소유한 재능과 녹봉, 재능과 복락을 다 쓰지 않고 넉넉하게 남겨서 남들이 쓰도록 하겠다고 할까요? 조물주가 나를 미워하지 못하게 하려고? 귀신이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려는 수단으로 그래야 했던 것일까요?
홍자성의 이러한 충고는 조물주나 귀신을 달래는 무속적인 차원에서의 행동지침이 아닙니다. 욕망에 끝과 한계를 측량할 수 없는 인간의 속성 상 적당히를 모르고 공이든 성취든 무한히 추구하여 이뤄나간다면 안팍의 변란은 필연적으로 찾아오게 되어있는 것이 당연한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렇게 극성을 이루다 쇠망하게 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가장 원초적이고 단편적인 사고로는 자기만의 선을 긋고 그 밖으로는 넘보지 않으며 두려움 속에 사는 인생을 상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인위적인 한계선 설정은 필연적으로 불편함과 고통, 그리고 이것기 과연 현명한 결정이 맞는가 하는 번민과 방황을 끌어내며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계가 없이 극성하여 쇠락하는 인생도, 억지로 두려움 속에서 자신이나 다른 이가 설정한 새장 안에 갇혀 사는 죄수같은 삶도 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주석에 인용된 왕대백의 사류명이 제시한 대안은 바로 “후덕함”, 즉 품성을 갈고 닦음으로서 이 아이러니를 돌파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홍자성이 말하고 있는 “다 쓰지 않고 남겨두겠다는 마음”은 쉽게 풀어 “후덕한 마음”으로 받아들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