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불길과 욕망의 물결이 한창 타오르고 끓을 때는
분명하게 그 잘못됨을 알면서도 또 분명하게 그 잘못을 범하게 된다.
알아차린 자는 누구이고, 범한 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타오르고 끓어오르는 순간에 퍼뜩 정신을 차릴 수만 있다면
간사한 마귀도 문득 참다운 도인이 될 것이다.
채근담 120
참으로 위대한 싯구가 아닌가 합니다. 그 잘못됨을 알아차리는 자도 나 자신이요, 그럼에도 또 그 잘못을 범하는 자 또한 나 자신임에 후회를 멈출 줄 모르며 절망과 회한의 수렁에 스스로 빠져가는 나를 관조하기 십상입니다.
도대체 나는 왜 그럴까요? 아니, 우리 인간은 왜 순간적인 분노와 욕망에 휩싸이면 그게 잘못이라는 걸 뻔히 알아차리고 있는 동시에 그걸 멈출 줄 모르는 황당하고 어리석은 일을 되풀이하는걸까요? 인간의 본질은 참으로 심연의 무저갱과 같아서 우리가 그걸 들여다볼 수 없을테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최대한 그런 어이없는 실태로 내 재산, 내 생명, 내 가족과 직장의 평안이 무너지는 일을 막기 위해 우리는 평소에 치열하게 준비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한 준비의 첫 걸음이 바로 저지르려는 그 순간, 내 마음이 욕망과 분노에 휩싸이는 바로 그 순간에 “퍼뜩” 여기서 격한 감정에 휩쓸려 나 자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걸 깨닫고 곧바로 정신차리는 훈련을 평소에 열심히 해놓아야만 합니다.
그런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 특히 욕망과 분노의 소용돌이는 결코 나 자신의 일부조차 되어서는 안되는 사탄 마귀와 같은 것입니다. “내가 한 성깔 한다”, “내가 좀 다혈질이야” 라고 스스로를 당당하게 표현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부끄러운 게 없습니다. 내 영혼은 반 쯤 마귀에 잡아먹혀있다고 고백하는 게 당당해서야 되겠습니까? 나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감정의 격류들은 오로지 슬픔과 연민, 그리고 기쁨(희열)이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정치학에 언급되고 있는 이른바 “카타르시스(catharsis)”, 즉 격하게 방출함으로서 나 자신을 정화시킬 수 있는 종류의 감정들이야말로 나 자신을 구성하는 진짜 본질이자 나를 지켜주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진짜배기 감정이라는 걸 항상 마음 속에 다짐하면서 나를 좀먹는 나의 대적자인 욕망과 분노가 내 안에서 휩쓰는 그 순간에 “퍼뜩” 이건 아니라는 걸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연습을 위해서라도 일시적이고 말초적인 자극이 아닌 진정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해주는 문학이나 음악 또는 희곡을 더 선호하는 것이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습관이자 교양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