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과 문장은 육신의 소멸과 더불어 사라지지만
정신은 만고에 늘 새롭고
공명과 부귀는 세상의 전환에 따라 변화하지만
절의는 천년도 하루처럼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은 결코 저런 성취로 정신과 절의를 바꾸지 말아야 한다.
채근담 148편
세상 사람들이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벗어나면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곧바로 부귀와 공명에 환장하는 이유는 “내가 죽은 다음”을 생각하고 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고 나서도 이 세상에 내 발자취를 남기고자 하는 욕구는 단순히 죽기 싫다는 기본적인 생존본능을 훨씬 뛰어넘는 강력한 본능입니다.
십억 재산이 생기면 백억 재산을 탐하고, 내 가족이 여유롭게 먹고 살 재산을 모았다면 이젠 내가 죽더라도 내 가족들이 평생 떵떵거리며 살 만한 재산을 모으기를 갈망하는 이유는 돈 그 자체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내가 죽고 난 뒤”에도 내 가족들이 나를 기억하고, 내 영향력이 내 가족들에게 전해지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돈은 힘이요 생명이며 영원으로 남기 위한 인간의 집착인겁니다.
그렇게 죽고 난 뒤에도 세상에 내가 잊혀지지 않고 남겨지기 원하는 마음을 충족하기 위해 어떤 거부는 자신의 이름을 딴 박물관이나 천문대, 심지어는 대학교를 남기기 위해 전재산에 가까운 막대한 재산을 가족이 아닌 사회에 기부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 이름을 국가와 인류문명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토록 남기는 방법은 돈이나 성취가 아닌 정신입니다. 붓다나 공자, 간디 같은 인물이 돈이 많아서 세상이 그들을 앞으로도 영원토록 기억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평범하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갈 수 밖에 없는 저같은 평범한 인생들은 어떤 삶을 지향하며 사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요?
언감생심 위인전에 오를만한 거창한 무언가를 주창할 수도 없고, 만세에 이를 충절과 절의를 남길 열사나 의사가 될 길도 없으며, 세상의 전환에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거룩한 정신의 표상이 될 수 없는 이 세상 99.99%의 평범한 이들은 그냥 하루하루 주어진 일상을 치열하게 버텨내며 연명하다, 소박하게 내 가족과 친구들에게 사랑 많은 아버지요 남편으로 기억되는 것, 그리고 수십년이 지나면 그냥 이 세상에서 잊혀져 사라지는 존재가 되는 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주제에 맞게 사는 방식일까요?
모르겠습니다. 물론 특정 종교를 믿는 신앙인이라면 각각의 신앙이 가르치는 세계관에서 약속하는 내세를 기다리며 이 세상의 덧없는 순간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 사는 게 자연스러운 태도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설령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실재하는 것과 신념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현실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이 결코 알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다고, 또는 알고 있는 척 속이는 태도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다가갈 수 없는 영원성에 대한 해답이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원하고 바랄 지언정 거짓된 것을 만들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땡의 수많은 이들과 다를 게 없는 한 명의 필멸자로서 바쁘고 경황없는 일상의 소소한 과제들을 최선을 다해 풀어나가되, 삼가 영원을 향한 경외감과 존경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경건함을 익히기를 소망해봅니다.